권력은 비판적 문화예술인들 핍박
줄서기 행태 반복땐 토대 황폐해져
대중예술 꽃 피워 열매 맺으려면
뿌리 역할의 전통·기초예술 키워야
K컬처 세계화는 ‘규제 철폐’가 핵심
단체 등 책임자 이념보다 자질 중요
지원 결정 심사위원도 균형 갖춰야
평소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분열과 갈등을 매우 염려했나 보다.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국립창극단 창극 ‘춘향’의 대본과 연출을 맡은 김명곤(70)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윤석열정부가 문화예술계 통합에 힘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가 그렇듯 편가르기와 ‘내 편’ 아닌 사람을 경원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문화예술계 현실을 고치지 않는 한 전통·기초 예술 분야가 더 허약해지고 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류 문화(K컬처)’도 발목 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93년 임권택 감독 판소리 영화 ‘서편제’ 각본과 주연을 맡아 유명해진 그는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민간인 출신 첫 국립극장장(2000.1∼2005.12)과 문화관광부 장관(2006.3∼2007.5)을 지냈다. 이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세종문화회관·마포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면서도 현역 예술인으로 연극·영화·방송 드라마 등 현장에서 연출가와 극작가, 배우로 활동 중이어서 누구보다 문화예술계 속사정에 밝다.
5년 전부터 ‘벨칸토 성악’을 배우며 클래식계도 알아가고 있다는 김 전 장관을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문화예술계 여러 분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어느 한 장르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며 “그래서 현 정부 문화 정책도 한번 훑어봤다”고 말문을 열었다. 앞서 윤석열정부는 ‘문화공영으로 행복한 국민, 품격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국정목표 아래 △보편적 문화복지 △예술인 지원체계확립 △전통문화유산 가치 제고 △K컬처의 초격차 산업화 등 7대 국정과제를 제시한 상태.
김 전 장관은 “먼저 지적하고 싶은 건 (문화예술 정책목표) 핵심 개념이 ‘문화공영’인데 이론적·철학적 배경을 설명하지 않아 생소하고 애매한 말”이라며 “국정과제들은 그동안 (역대 정부) 정책들을 잘 집대성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다만 K팝과 K드라마 등 대중문화 중심 K컬처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예상되는 것에는 적잖은 우려를 내비쳤다. 그는 “우리 대중음악과 영화가 꽃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 데는 전통 민요와 트로트, 연극 같은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K컬처를 만들어내는 그 뿌리와 자양분을 잘 육성하고 지원하는 게 정부 역할이지 이미 아름답게 피어서 사람들이 다 사는 꽃(대중문화)을 더 많이 피워 세계에 팔자고 국가 예산을 쏟아붓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중예술계는 정부가 지원 안 해도 세계화를 위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며 엄청난 인기와 돈을 모으고 있는 만큼 알아서 꽃을 피우도록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게 낫다”며 “그 꽃이 시들지 않고 오래 피도록 하려면 그 뿌리 역할을 하면서도 형편이 열악한 전통·기초 예술 분야를 아낌없이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수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한 김 전 장관은 이명박·박근혜정부에 이어 문재인정부에서도 문화예술계 편가르기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라고 지적했다. 새 정부가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라는 주문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을 핍박하려 하는데 예술은 창조와 비판, 풍자가 본질”이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중·노무현정부 이후) 보수·진보정권 모두 비협조적이고 비판적인 예술가를 은근히 억압한 게 문화예술계의 심각한 병폐가 됐다”고 지적했다. 또 “갈수록 정부 지원금에 목매는 상황에서 (정권이) ‘예쁜 놈(예술인)’에게 예산을 더 주고 미운 놈에겐 안 주거나 덜 주니 예술인들이 자기 검열해가면서 정치에 종속돼 가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일갈했다. 이 때문에 정치권 줄서기 행태가 반복되면서 문화예술계가 너무 황폐해졌다는 것이다.
김 전 장관은 “윤석열정부는 앞선 정부들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문화예술 정책에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편가르기를 하지 못하게 확실한 장치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문화예술 단체·기관 책임자의 경우 이념 성향이 달라도 자질과 전문성이 뛰어나면 중용하고, 지원사업 등을 결정하는 심사·자문위원도 균형 있게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 전 장관은 “무엇보다 정치권에 줄 대는 문화예술인을 경계해야 한다. 문재인정부 때도 ‘선거에 도움 줬다고 자리 주는 거 하지 말라’고 주의하라고 경고했는데 안 되더라”며 “선거에 도움 준 사람인 걸 고려해도 문화예술계가 볼 때 ‘그래도 저 정도면 괜찮다’는 인사를 써야 한다. 가급적 정치권과 거리를 둔 사람들 위주로 널리 인재를 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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