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기다리다 트럭에 실려
14살에 탈출… 가족 못 찾고 노숙
복지원서 이름·나이 엉터리 기재
2022년 친동생 찾아 원적 회복 착수
치매 부친 날 못 알아봐 안타까워
평범했던 설수용(54)씨의 인생은 6살이었던 1974년 어느 날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횡단보도를 먼저 건너간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던 수용씨 앞에 큰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한쪽 팔에 완장을 찬 건장한 남성 2명이 트럭에서 내리더니 수용씨를 짐짝 던지듯 차에 태웠다. 이미 차 안에는 수십명의 또래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땐 몰랐다. 그 이후로 48년간 가족을 보지 못할 줄은.
24일 오전 서울 중구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수용씨는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당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수용씨는 “형제복지원에 가자마자 신고식을 한다고 기존 원생들에게 새로 온 원생을 쇠파이프로 때리라고 시켰다”며 “구타당한 뒤 일주일 동안 너무 아파서 기어 다녔다”고 말했다.
수용씨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이날 진실화해위는 당시 형제복지원에서 강제노역과 임금착복, 구타, 성폭력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수용씨와 마찬가지로 가족이 있는 수용자는 강제로 생이별을 당했다.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은 사라진 수용자들을 실종자로 신고했다. 수용씨 가족들도 그를 찾아 헤매다가 입대 영장이 날아올 때쯤 수용씨가 사망한 것으로 신고했다.
형제복지원에 구금된 수용씨 역시 노역에 시달렸지만 임금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수용자들이 강제노역한 대가로 지급하는 자립 적금(예입금)을 주지 않거나 착복했다. 1986년 1인당 평균 예입액은 약 55만원이지만 평균 지급액은 20만4000원에 불과했다.
수용씨는 1982년 형제복지원을 탈출했다.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살던 동네를 샅샅이 뒤져도 가족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용씨가 실종된 후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수용씨는 “한동안 노숙하다가 당시 숙식을 제공하는 신문배급소에서 일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후 배달원, 공사장 잡부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올해 1월. 수용씨의 친동생인 수철씨였다. 수철씨는 “형제복지원 출신 목사님에게 ‘나도 부산에서 형님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더니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 하더라”며 “피해자 모임에 ‘설수영’이란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 수철씨는 긴가민가했다. 설수용이란 이름이 아니었을 뿐더러 목사에게 들은 나이가 자신이 알고 있던 형의 나이와도 달랐던 것. 형제복지원이 수용자 신상 조사를 엉터리로 하고 새로운 호적으로 등록하는 바람에, 그동안 수용씨는 엉뚱한 이름과 나이로 살아왔던 것이다.
어렵게 통화한 두 사람은 곧 서로가 혈육임을 직감했다. 수철씨는 “같이 살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들, 우리만 알고 있는 사건과 장소를 둘 다 기억하고 있었다”며 “부산 영도대교 밑에 있던 아버지 조각배나, 충남 서천군 외갓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확신을 갖고 진행한 유전자 검사 결과도 혈연관계로 나왔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함께 찾아갔다. 아버지 설모씨는 중증 치매를 앓고 있어 48년 만에 만난 큰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철씨는 “아버지가 건강하셨을 때 형을 찾았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늦게 찾은 것이 너무 아쉽다”면서 “형이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사건이 우리 가족이 비극적으로 살게 된 시발점인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수용씨는 현재 원적 회복 절차를 밟고 있다. 50년 가까이 ‘설수영’으로 지내던 그에게 단 한 글자 차이지만, 수용이란 이름으로 바뀌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다.
수용씨는 “진실화해위 진상 규명 내용에 미비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오늘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