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의 공동개최 제안 수용한 키아프
“한국 작가 세계 알릴 기회” 기대 컸지만
프리즈로 관람객·후원사 쏠림 아쉬움
VVIP 입장 때 대혼잡·가방 검사 시비
외국 화랑들, PDF만 보여주고 판매도
“韓 미술시장 잠재력 인정받은 건 수확
키아프·미술계 부흥 발판 삼기 위해선
신진작가 발굴 등 내적 경쟁력 키워야”
역대급 미술 장터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서울이 6일, 외국계 미술 장터 프리즈(Frieze) 서울이 5일 각각 종료된다. 2020년 9월, 프리즈가 서울 진출을 모색하며 키아프 측과 협의 중이라는 사실이 공식화된 2020년 9월4일 이래 2년여 여정이 일단락됐다. 추진 과정부터 뚜껑을 열기까지 주요 장면을 꼽고, 이를 통해 ‘키아프리즈(키아프×프리즈)’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와 의미를 짚었다.
#장면 1. “한국미술 힘내자” 다짐했는데
기대와 긴장이 교차했다. 개최 하루 전이었던 지난 1일 오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는 한국 기하추상을 이끈 이승조(1941∼1990) 개인전 간담회가 열렸다. 윤혜정 이사는 “한국미술에 정말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한국미술계에 전례 없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아쉬운 한국 작가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이 시기에 이승조 전시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비장할 만했다. 홍콩, 상하이, 도쿄 틈바구니. 한국은 아시아 변방의 로컬 시장에 불과했다. 액수로는 세계 미술시장 거래액의 1%에 불과했다. 그런 국내 미술시장에 미술품 판매 증가, 국내 경매사의 매출 신기록 등이 벌어졌다. 미술애호가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청신호’로 보였다. 시중 유동성 흡수, 투기 수요도 있겠지만, 진정 어린 미술 애호 역시 늘었다는 ‘희망’에 부풀 만도 했다.
결국 프리즈의 공동 개최 제안을 받은 키아프는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했고, 세계 미술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메가 이벤트를 감행했다.
국내 화랑들에 위협이 될 거란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키아프는 다양한 노력도 기울였다. 전시 수준을 높이기 위해 참가 화랑 심사 기준을 한껏 높였다. 쾌적한 관람 환경을 위해 수익 감소를 각오하는 대신 부스와 복도 빈 공간과 휴게 장소도 대폭 넓혔다. 프리즈에만 나가려는 ‘얌체족’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키아프는 프리즈에 나가려는 회원사는 키아프에도 반드시 부스를 내도록 강제했다. 키아프플러스도 론칭해 한정된 인력으로 두 페어를 치렀다.
#장면 2. 재벌들은 리움에 모여 외국계 장터 홍보
같은 날 저녁,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선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주최 하에 재벌과 연예인들이 총출동한 프리즈 전야제 ‘씨제이 나이트 포 프리즈 서울(CJ night for Frieze Seoul)’이 열렸다. 최태원 SK 회장과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은 1층으로 입장하며 찍힌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프리즈 지원’용 행사임을 명백히 했단 점에서, 프리즈와 대등하게 행사를 치르려 안간힘을 써 온 국내미술계가 당혹했다.
논란을 지켜본 한 문화평론가는 “보통 의미가 아니다. 이건희 소장품전을 보며 사람들이 이견 없이 공감하는 포인트가 무엇이냐. ‘이건희가 아니었다면 외국에서 다 사갔겠구나’하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경 부회장이 자신의 연예인 인맥, 외국 셀럽 자본과 결탁한다면 그것은 사건이다. 앞으로 행보를 지켜볼 일”이라고 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프리즈 마케팅’에 열을 올린 모습은 CJ뿐이 아니었다. LG전자는 프리즈 공식 스폰서로 이름을 올렸다. LG는 키아프 후원사 명단에 계열사 단 한 곳의 이름도 올리지 않았다.
#장면 3. 프리즈 운영 미숙, 터지다
개막 첫날인 2일, 프리즈에선 세계적 아트 페어 답지 않은 운영 미숙 사례가 속출했다. VVIP입장 때 인파가 무질서하게 밀고 들어갔다. 가방 검사를 하려던 보안요원은 “저기요! 가방 검사 하셔야죠!”라며 밀고 들어가는 인파의 뒤통수에 소리를 쳤지만 허사였다. 가방 검사를 하는 일도 국내에선 흔치 않은 일이라 생소했고 “기분이 나쁘다. 혹시 아시아라 하는 건가”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나의 입장권으로 똑같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키아프에서는 가방 검사를 하지 않는 터라 우스운 모양새이기도 했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CEO는 기자간담회에서 ‘가방 검사를 영국, 미국에서도 하는지’ 질문에 “다른 도시에서도 한다”고 답했다.
입장권을 대신한 바코드도 오류로 ‘말썽’이었다. 현장 안내 부스에 “바코드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관람객이 이어졌다. VIP들도 입장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VIP 맞을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불만 섞인 말이 들렸다.
운영 미숙 문제는 수개월 전부터 예고됐다. 프리즈서울 측은 행사를 불과 2개월 앞두고 홍보대행사를 계약해 가동했다. 이 홍보대행사는 미술 관련 경력이 전혀 없는 회사였다. 프리즈라는 세계적 업체가 첫 아시아 진출을 한다는 이 ‘사건’의 무게에 비해, 인력이나 숙련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이 준비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프리즈 계기 외국 화랑들의 ‘PDF 장사’, ‘아웃렛 장사’가 판친다는 말도 들렸다. ‘PDF장사’는 실물을 보지 않고 작품 사진 모음을 PDF 파일로 된 서류로 보내 고르게 한단 얘기다. ‘아웃렛장사’는 A급 작품들은 해외 본점에서 팔고, 남은 것을 한국에 가져와 ‘떨이 장사’를 한단 얘기다. 외국 화랑들 영업 행태를 ‘횡포’ 수준이라 하는 한 아트 딜러는 “PDF도 많이 받았고, 손님이 제시된 가격에 구입하기로 했는데 최종 송금 1시간 전에 갑자기 가격을 올리더라”라는 경험담을 털어놨다.
반면 외국 화랑들은 손님 탓을 한다. “한국 소비자들은 작가와 작품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묻는 것은 오직 가격”이라고 한다.
#장면 4.“투기 수요 빼고 성숙할 시간 필요”
행사장엔 첫날인 2일(VIP 사전 입장일) 관람객 쏠림 현상이 극심했다가 차츰 완화됐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평론가는 “수준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키아프도 올해 제일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3층(프리즈) 보고 1층(키아프)을 가면 바로 비교가 돼버리니까 유독 차이가 느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미술계 관계자는 “첫 프리즈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크니 프리즈부터 몰려갔기 때문에 왜곡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첫날 프리즈에 몰린 인파와 키아프에 몰린 인파의 차이는 급속한 투기 수요를 일으켜온 한국 졸부들의 ‘오픈런’과 차분히 행사 전반을 즐기려는 미술애호가의 숫자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평을 내놨다.
키아프리즈를 계기로 일어났던 미술 부흥은 착시일까 진짜일까. 지난 2일 크리스티홍콩의 관계자들이 방한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는 새겨들을 만한 말들이 나왔다. 이들은 “급하게 성장하려는 ‘빨리빨리’ 문화가 여전한데,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술계는 시장(市場)의 힘만으로 나아갈 수 없단 점도 상기해야 한다. 미술관 등 공적 영역의 담론 생산, 비전 제시, 신진 작가 발굴 등은 미술계의 또 다른 축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시장 무게만 커지고 미술계 담론은 안 나오는 이런 불균형이 지속된다면 정말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프리즈를 통해 외국계 아트 페어가 한국 시장이 소화할 만한 곳인지 ‘간’을 보는 것”이라며 “마냥 들떠선 안 되고 대비책을 모색하면서 행사를 치러야 한다. 키아프 역시 ‘키아프다움’을 만들지 못하면 경쟁력이 위축될 것”이라고 했다.
황달성 회장은 4일 “‘실(失)’이 20%이라면 ‘득(得)’은 80%다.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세계 미술시장의 한 축으로의 등장을 세계가 인정했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고 했다. 프리즈라는 ‘점령군’에 의해 국내 미술시장이 위축되는 것 아닌지 우려에 대해 “한국인은 적응력이 강하다. 겪어야 할 일이고, 결국엔 적응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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