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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탄광위에 세운 ‘북방의 천사’
광부들의 영혼 보듬는 몸짓에
생존과 희망 기원 英 상징으로
미술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

사람이 빛도 없고 공기도 희박하고 물과 식량도 거의 없는 동굴에서 열흘이나 버텼다면, 그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봉화 아연광산의 매몰된 갱도에서 고립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광부 소식을 접하며 안도와 더불어 그런 의문이 들었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와 생존 본능일 수도 있고, 반드시 구조되리라는 사회연대에 대한 믿음과 살 수 있다는 희망일 수도 있다. 말도 안 되겠지만 지금 나는 기적의 문제를 미술로 풀어보려 한다.

아연광산 생존자 중 한 사람의 자택이 예전에 광부들의 도시였던 강원도 정선이라고 한다. 몇 년 전에 정선에 학생들과 견학 간 적이 있다. 광산은 근대 산업화의 신화를 일구어낸 역사적 현장이고, 그 시절 남편과 아버지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 식구를 먹여 살리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런 광산이 폐광되면서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정선의 삼탄아트마인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폐광지에서의 미술 체험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미술품은 거친 산업의 현장이 아니라 풍요롭고 우아한 곳에 걸려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시 정선의 광부들은 ‘안녕히, 무사히’ 다녀오시라는 가족의 아침 인사를 그저 의례가 아닌 낱말의 의미 그대로 생생히 절감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채굴 기구들이 작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멈춘 듯, 삼탄아트마인에는 삶에 대한 광부들의 간절한 애착이 흠씬 배어 있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에 작은 동요가 일었는데, 장소에 켜켜이 스며 있는 인생의 흔적들 탓이었다.

미술작품 중 눈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뭉근한 울림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작품의 대다수는 삶에 대한 인간의 애착과 결부되어 있다. 그 한 예로 세계에서 가장 큰 천사로 불리는 작품 ‘북방의 천사’를 들 수 있다. ‘북방의 천사’는 영국의 조각가 앤터니 곰리(Antony Gormley)가 만들어, 한때 석탄을 캐내던 광산동굴 위 언덕에 세워졌다.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행되면서, 낙후된 탄광도시 게이츠헤드에 현대적 감각의 상징물을 세워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는 시도였다.

이 작품은 사람의 몸통에 양옆으로 새처럼 커다란 날개를 펼친 형태인데, 키는 약 4층 정도의 건물만큼 높고 양 날개는 여객기 보잉 757의 날개보다 크다. 강철로 이루어진 ‘천사’의 무게는 208t이나 되고, 작품의 밑부분에도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를 부었다. 언덕은 강풍이 부는 곳이었다. 도시를 지켜줄 수호천사라면 시속 160㎞의 모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작품 계획안을 공개했을 때 처음에는 시민의 반대가 대단했다. 그 정도의 비용을 들일 거라면 차라리 당장 부족한 병원과 복지시설을 늘리자는 목소리가 컸다. 조각가 곰리 역시 시의회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았을 때 그것이 꼭 필요할지, 과연 어울릴지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직접 설치 장소에 가본 후에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언덕에 서서 그 아래 어둠 속에서 일했던 게이츠헤드의 광부들을 떠올렸고, 일터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이름이 수없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후손이 아직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곰리는 광부들의 영혼이 이제는 지하가 아닌 언덕 위의 땅에 발을 두고 저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기를, 그리고 양 날개를 한껏 펼쳐 날 수 있기를 바랐다. ‘천사’의 날개는 누군가를 안아주듯 약간 안쪽을 향하게 기울어 있다. 넓은 품 안으로 그 앞에 선 사람들을 보듬어주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오늘날 ‘북방의 천사’는 시의 상징을 넘어 영국의 상징이 됐고, 게이츠헤드는 관광도시로 북적인다.

미술품은 생존과 희망에 관한 것이기에 늘 우아한 곳에 자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술이 있는 곳이 곧 우아한 삶이 있는 곳으로 뒤바뀌는 기적은 종종 일어난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미술은 기적의 이야기이고, 생존한 사람은 인생 자체가 미술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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