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범 위험성 확인…전자발찌 부착 등 추가
2008년 사이코패스 판단 PCL-R 국내 도입
유영철 38점 최고…이은해 31점으로 높아
“사이코패스 모두 범죄자 되는 것은 아냐”
자신의 동거녀와 택시기사를 잇따라 살해한 이기영(31)이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 초기 단계에서는 일부 항목에 대한 평가 자료 부족으로 결론 내리기 어려웠으나, 여러 자료와 행동을 고려할 때 사이코패스 성향이 관찰된다는 소견이 나온 것이다.
언론은 강력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범인이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에 관심을 갖는다. 이기영이 검거됐을 당시에도 그의 사이코패스 여부에 대한 추측이 쏟아졌다.
범죄자의 사이코패스 판정 여부는 무엇 때문에 중요한지, 그 이유와 악명 높은 범죄자들의 사례를 살펴본다.
◆재범 가능성 높아…‘양형’ 고려 요소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감능력 결여다. 이들은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도 피해자를 탓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며 범죄를 게임으로 인식해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즉, 범죄자가 사이코패스일 경우 재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회와 더 오래 격리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이코패스 여부는 사건 수사 단계에서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양형에는 매우 중요하게 고려된다. 사이코패스로 판단될 경우 재범 위험이 높기 때문에 형량에 전자발찌 착용 등 보안처분이 추가될 수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이코패스는 뉘우침이 없고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또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면서 “스토킹 살해범 김병찬이 40년형을 선고받았고 15년 전자발찌 착용 등 보안처분이 추가됐다. 보안처분을 추가할 때 사이코패스 여부를 고려한다”고 설명했다.
수사기관은 전문적인 도구를 사용해 사이코패스 검사를 진행한다. 캐나다 범죄심리학자 로버트 헤어가 사이코패스 여부를 보다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도록 개발한 PCL(phychopathy checklist)이다.
현재 사용되는 PCL-R은 20문항으로 이뤄져 있다. 40점 만점에 미국은 30점 이상, 한국은 25점 이상을 사이코패스로 본다. 일반인은 15점 안팎의 점수가 나온다. 이 도구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신뢰성이 검증됐다.
물론 20개 문항만 단순히 계산해 사이코패스 여부를 결론 내는 것은 아니다. 임상전문가 2인 이상이 참여해 검사 대상자의 과거 행적과 성장 과정, 앞선 범법 행위, 정신과적 진단 등 자료와 면접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
한국은 2008년 PCL-R를 도입해 범죄자들의 재범 위험성, 폭력성, 치료가능성을 예측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계획적 살인’ 정황 드러난 이기영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전담수사팀은 19일 강도살인 및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상 보복살인 등의 혐의로 이기영을 구속기소했다면서 “그가 사이코패스로서 재범 위험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대검 통합심리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기영은 자기중심성, 반사회성이 특징이고 본인의 이득이나 순간적인 욕구에 따라 즉흥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으며 감정과 충동 조절 능력이 부족한 사이코패스 성향이 관찰됐다.
이기영의 사이코패스 점수가 몇 점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검찰은 “폭력범죄 재범 위험성이 ‘높음’ 수준으로 평가됐다”며 이기영에 대해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을 청구했다.
이기영의 범죄는 잔혹했다. 그는 지난해 8월 경기 파주시 주거지에서 동거녀이자 집주인이던 A(50)씨의 휴대전화와 신용카드 등을 빼앗을 목적으로 둔기로 A씨의 머리를 10여차례 내리쳐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기영은 A씨 살해 전 ‘먹으면 죽는 농약’, ‘휴대전화 잠금 해제 방법’을 인터넷에 여러 차례 검색한 것으로 파악됐다. 계획적인 살해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범행 후에는 ‘파주 변사체’, ‘공릉천 물 흐름’ 등을 검색해 시신이 발견됐는지 살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기영은 이어 4개월여 만인 지난해 12월 20일 택시기사 B(59)씨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하고 옷장에 시신을 유기한 혐의도 받는다.
앞서 4차례 음주운전으로 처벌받은 적이 있는 그는 택시기사가 신고를 할까 두려워 합의금을 주려고 집으로 유인했다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기영은 두 차례 범죄 후 피해자들의 명의를 이용해 총 1억3000여만원의 돈을 편취했으며 범행을 은폐하려고 피해자들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는 범죄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박탈하고 그들의 고통과 가족들의 슬픔을 철저히 외면하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유영철 38점·이은해31점…사이코패스 범죄자들
이기영에 앞서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여러 강력범죄자들이 있다. 그중 사이코패스로 밝혀진 인물도 많았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내연남과 함께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은해가 대표적이다. 재판 과정에서 알려진 그의 사이코패스 점수는 31점이다. 2008년까지 10명을 연쇄 강간·살해한 강호순(27점)보다 높았다.
경찰이 진행한 사이코패스 검사에서 역대 최고점을 받은 이는 2003∼2004년 총 2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다. 유영철의 점수는 38점으로 만점에 가깝다.
2021년 전자발찌를 끊고 여성 두명을 살해한 강윤성은 33점으로 역대 두번째다. 강윤성은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더 많이 죽이지 못한 게 한이 된다”며 전혀 반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의 사이코패스 점수도 29점으로 높았다. 생후 20개월 된 동거녀의 딸을 성폭행·학대·살해한 20대 양모씨(26점)와 딸의 친구를 성폭행 살해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25점)도 검사 결과 사이코패스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력범죄자라고 해서 모두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다. 2021년 3월 서울 노원구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은 범행을 치밀하게 계획하는 등 일부 반사회적 성향을 보였으나 사이코패스 기준 점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2019년 전 남편을 펜션으로 유인해 살해하고 시신을 잔혹한 방식으로 훼손·유기한 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고유정도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경찰은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데, 고유정은 6년간 결혼생활을 했고 재혼 남편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는 아니다”면서 PCL-R 검사를 의뢰하지 않았다.
지난해 ‘신당역 스토킹 살인범’ 전주환도 프로파일러 면담에서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으로 판단됐다.
물론 이와 반대로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지만 범죄자가 아닌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뇌 신경학자인 제임스 팰런이다. 그는 연구를 위해 자신의 뇌를 스캔했다가 사이코패스의 뇌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평소 사람들에게 공감능력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미디어에서 잔인한 장면을 접해도 별로 공포심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범죄 전과도 없으며 아내와 자식을 둔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다.
팰런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이코패스 뇌과학자’에서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성향으로 시작되지만 자라온 환경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서 사이코패스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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