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낙화암 오르니 백마강 한눈에/고란사 약수 마시면 3년 젊어질까/구조미 빼어난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 사비백제 흔적 가득
고란사 선착장을 출발한 백마강 3호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른다. 귓불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바람은 봄의 온기를 머금어 사랑하는 연인의 손길처럼 부드럽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출발하길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오는 노래는 나이가 지긋하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흘러간 옛 노래 ‘꿈꾸는 백마강.’ 어린 시절 부모님 손잡고 놀러 간 유원지마다 흘러나오던 그 노래는 아련한 추억으로 이끈다.
◆낙화암 올라 푸른 백마강을 마주하다
충남 공주시 공산성과 고마나루를 굽이쳐 흐르는 금강은 서해로 향하다 부여군으로 들어서면 백마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에 달하는 백마강을 즐기는 부여 대표 여행지가 바로 관북리유적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여읍 부소산성. 60여년의 웅진시대를 마감한 백제는 성왕 16년인 538년 부여로 옮겨 왕궁을 짓고 123년의 찬란한 사비백제시대를 열었다. 당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던 부소산성은 사비성으로 불렸고 이곳에 유명한 낙화암과 고란사가 있다.
부소산문 매표소를 지나 삼충사와 영일루를 거쳐 태자골 숲길로 들어서자 아름다운 숲이 여행자를 반긴다. 산성이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정원 느낌인데 이유가 있다. 평소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 위급할 때만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태자들이 걷던 길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2002년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소조불상, 연화문 수막새, 벽화편 등이 출토된 왕실의 기원사찰 서복사지를 지나면 반월루가 등장한다. 누각에 오르자 부여읍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부소산성 옛 이름은 반월성으로 멀리 흐르는 백마강 모습이 마치 달과 같아 이런 이름을 얻었다. 반월루 앞에는 노란 산수유꽃이 활짝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다.
반월루에서 다시 낙화암 쪽으로 길을 잡으면 기묘한 암석과 소나무로 둘러싸인 백화정을 만난다. 그 아래가 낙화암 전망대. 날씨가 풀리자 평일인데도 많은 이가 봄마중을 나왔다.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과 삼천궁녀 등 낙화암을 둘러싼 여러 얘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따르면 660년 나당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돼 백제가 멸망할 때 후궁들이 화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부여성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졌으며 이에 ‘타사암(墮死巖)’으로 불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후궁이 나중에 궁인으로 와전됐고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해 ‘낙화암(落花岩)’으로 부르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조망하는 백화정도 ‘꽃 화’를 쓴다. 꽃잎처럼 떨어져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50m 높이 절벽 위에 마련된 낙화암 전망대로 내려서면 푸른 하늘 아래 백마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가슴이 탁 트인다. 돌아가는 길에 올려다보는 백화정이 훨씬 운치 있다. 정자 아래 바위에 서서 포즈를 잡으면 멋진 인생샷을 건질 수 있으니 꼭 시도해보길.
◆고란약수 한 모금 마시고 3년 젊어져 볼까
고란사는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한다. 한 번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고란약수가 유명해서다. ‘우리 가족 모두 운수대통하게 하소서’, ‘우리 손주들 건강하게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거라’. 고란사로 들어서자 백마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소원지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래 올봄에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고란정으로 들어서 고란약수 한 바가지 가득 담아 목젖으로 흘려보내자 “캬아∼”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비릿한 철분 냄새가 나는 보통 약수와 달리 물맛이 아주 깔끔하면서도 달다. 전설대로 3년은 젊어지는 느낌이니 약수가 유명해진 이유를 잘 알겠다.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진다. 백제의 왕들은 고란약수를 즐겨 마시며 건강을 챙겼는데 진짜 고란약수인지 증명할 수 있도록 약수터 뒤쪽 절벽에 자라는 희귀하고 기이한 풀을 가져와 물동이에 띄우도록 했단다. 고란사 주변 습한 바위틈, 절벽, 벼랑 끝에서 자라는 고란초는 수명이 무려 30∼50년이라니 놀랍다. 얘기를 듣고 보니 고란초가 건강을 지키는 신비한 약초인 듯싶다. 현재는 대부분 자취를 감춰 절벽 틈에만 조금 남아 있단다. 운이 좋으면 행운의 고란초를 발견할 수 있으니 잘 찾아보길. 고란사는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이윤영의 그림 ‘고란사도’에 등장할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낙화암 절벽에는 ‘落花岩’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제대로 보려면 배를 타고 백마강 유람에 나서야 한다. 고란사 선착장∼구드래나루터를 오가는 황포돛배를 타면 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힘차게 배가 출발하자 1940년 발표된 이인권의 구성진 목소리가 담긴 ‘꿈꾸는 백마강’이 흘러나온다. 사비백제의 흥망을 담은 노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매 금지시켰고 광복 후엔 작사가 조명암이 월북하면서 다시 금지곡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인권은 태평양전쟁 중에는 군국가요를 부르기도 했고 6·25전쟁 중 아내와 함께 국군 위문공연을 펼치다 부인이 포탄에 맞아 사망한 비운의 가수이기도 하다. 노래를 따라 하느라 너무 정신을 팔면 낙화암 글씨를 놓친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여서 다시 볼 기회는 없으니 눈을 크게 뜨고 잘 찾아봐야 한다.
부여는 백제의 고도인 만큼 유적이 넘쳐난다. 성왕이 수도를 옮긴 직후 도성 중앙에 정림사를 세웠는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완벽한 구조미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오층석탑보다 석조여래좌상이 매우 눈길을 끈다. 심하게 마모돼 형체만 남았는데 진리를 상징하는 고려시대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되며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가 빼어나다. 백제의 멋과 풍류가 넘치는 궁남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정원으로 서동요의 전설이 깃든 곳. 아직 좀 썰렁하지만 초록초록 연잎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연못 주변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함께 수채화를 만들며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연인들이 즐겨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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