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 대여 등 72건 불법 적발
인천 피해자들 긴급주거 주택
10채 중 4채 ‘원룸’… 원성 높아
서울 양천·구로·관악·금천구 등
수사 의뢰한 의심거래만 469건
최근 전국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급증하는 가운데 공인중개사들의 도덕적 해이가 지탄받고 있다. 세입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공인중개사들이 오히려 건축업자 등과 짜고 범행을 벌여 이들을 믿었던 대학생, 신혼부부 등을 낭떠러지로 떠밀었다. 공인중개사의 일탈행위는 피해자 양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는 지난 1∼3월 깡통전세 피해 사례를 제보받아 수사를 벌여 전세사기에 가담한 공인중개사 6명, 중개보조원 4명 총 10명을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 형사입건했다고 24일 밝혔다. 서울시 민생침해범죄신고센터에 따르면 범행은 주로 시세를 알기 어려운 신축빌라의 가격을 부풀려 전세계약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이 깡통전세 위험이 큰 줄 알면서도 성과보수 등을 노리고 불법 중개행위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됐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대부분 대학 신입생, 취업준비생 등 부동산 계약 경험이 미숙한 청년층에 집중됐다. 범행수법 또한 갈수록 교묘해져 부동산컨설팅 업자까지 개입한 사례도 확인됐다.
시는 또 25개 자치구와 전세가율이 높은 지역의 공인중개사무소를 대상으로 합동 조사한 결과 자격증 대여 등 72건의 불법행위를 적발했다. 금지행위 위반, 무자격자 광고 등 4건은 무관용 원칙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거래계약서 작성위반, 고용인 미신고,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위반 등 11건은 업무정지 처분하고 중개대상물 표시광고 위반,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부적정 등 18건에 대해선 과태료를 부과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에서도 건축업자와 결탁해 피해자를 현혹한 공인중개사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사기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공인중개사가 6명이고, 3명은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피의자가 토지를 사들일 때 명의를 빌려주고, 월급과 성과급 등을 받으며 세입자를 끌어모은 혐의를 받는다.
업계에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조원균 한국공인중개사협회 홍보팀장은 “회원이 많으니 협회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아직 법정단체로 승격되지 않아 회원들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나 단속 권한조차 없어서 부정행위를 한다는 제보가 들어와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지방자치단체의 부실한 피해자 대책도 도마 위에 올랐다. 대규모 전세사기가 발생한 인천에선 공공기관이 확보한 임시거처 10채 중 4채가 방 한 칸짜리 원룸으로 파악돼 피해자들의 원성이 나온다. 인천시 등에 따르면 관내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입주할 긴급주거 주택 238호 중 91호(38.2%)는 전용면적 20㎡ 미만 원룸이다. 이보다 큰 면적의 20∼59㎡ 122호(51.2%), 60∼85㎡ 25호(10.5%)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이 주거 불안정으로 도움을 원할 땐 기존 집과 면적이 유사한 5곳을 둘러보고 하나를 골라 이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규모 59㎡ 미만이 전체의 90%가량을 차지해 현실적으로 선택 범위가 넓지 않다. 식구가 2∼3명이라면 원룸에서 지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추홀구 일대의 대다수 피해 아파트와 빌라는 방 2∼3개 구조로 전해진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국토부는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전세사기 의심거래 469건을 경찰청에 수사의뢰했다. 지역별로는 서울 291건, 인천 92건, 경기 80건 등으로 나타났다. 서울이 가장 많아 사실상 전역이 위험에 노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빌라왕’ 사건이 발생한 강서구(166건) 화곡동 외에도 양천구(27건), 구로구(25건), 관악구(15건), 금천구(15건) 등 18개 자치구에서 발견됐다. 이번 의뢰건은 서울·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돼 국토부로 넘겨진 사례들만 해당한다. 범위를 전국으로 넓히면 전세사기 의심거래 규모는 훨씬 더 커질 전망이다.
◆피해자, 거주 주택 매입 때 ‘취득세 면제’ 검토
정부·여당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우선매수권으로 해당 주택을 매입할 경우 취득세를 최대 100% 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24일 국민의힘에 따르면 당정은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주택을 취득하길 희망하는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취득세와 재산세 등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본세율로 주택 가격의 1∼3% 부과되는 취득세를 절반에서 최대 전액까지 면제하는 안과 재산세를 일정 기간 일부 감경하는 등의 안이 제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 사기 피해자를 긴급복지지원 대상에 추가하는 방안도 협의 중이다. 긴급복지지원 사업은 위기 발생으로 생계유지가 곤란한 중위소득 75% 이하 저소득층에 대해 생계, 의료, 주거 등 긴급생계지원금을 일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국회 복지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전세사기 피해자 관련해) 긴급히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협의하고 있다”고 답했다.
당정은 전날 협의회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거의 없는 만큼 이번 주 국회에서 특별법 입법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야당에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부·여당의 조치가 “피해자를 약 올리는 것”이란 반응이다. 이재명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초부자 세금 깎아줄 돈은 있어도 공공 매입할 돈은 없다는 말인가”라고 질책했지만 민주당의 대책도 재원 마련 방안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책 발표 전 피해자들과 먼저 대화해달라”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정부가 ‘갈라치기’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와요.”(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최은선 부위원장)
정부가 연일 경매 중지, 우선 매수권, 매입임대주택 등 전세사기 피해 대책을 쏟아내는 가운데 피해자들은 “대책을 내놓기 앞서 자신들과 대화해달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가 각기 다른 피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대책을 세우고 일괄 적용한 탓에 피해가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야당과 대책위가 요구하는 ‘선 보상 후 구상권 청구’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재차 밝혔다
24일 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에서 세계일보 취재진과 만난 최 부위원장은 “정부가 경매 중지, 우선매수권, 최우선 변제금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다 해결된 줄 안다”며 “실상은 최우선변제금만 받고 집에서 나가려던 피해자는 정부가 경매를 중지하면서 이자만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은행이 (부실채권을) 대부·추심업체로 넘겨버리기도 한다”고 했다. 정부가 대책으로 마련한 경매 중단 조치가 모든 피해자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추홀구 대책위 소속 박대건(38)씨도 “경매 중단 조치가 집 없고 힘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이긴 했다”면서도 “경매 속행을 원하는 피해자도 있는 만큼 중단 여부를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박씨는 “정책을 만들기 전 피해자 이야기를 들어야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 것 같다”고 강조했다.
미추홀구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잇따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자, 정부는 미추홀구 전세 피해 사례를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전체 전세피해 중 미추홀구 같은 사례는 오히려 소수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날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가 주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 교수는 “미추홀구 전세피해는 악질적인 폰지사기 형태지만, 전세피해 대부분은 화곡동 사례처럼 선순위가 많지 않은 경우”라고 했다. 이어 “화곡동은 피해 가구들이 모여서 한 번에 경매를 신청해 선순위 채권을 갚고 남는 돈을 피해자들이 나눠 가져야 한다”며 “피해자 상황이 매우 다양한 만큼 다양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임 교수에 따르면 △즉각적인 경매 유예 △임차인 우선 매수권 △보증금 반환채권 공공 매입 △깡통전세 주택 공공 매입 △금융기관의 부실 선순위채권 양수 △채무조정제도 연계라는 총 6가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원 장관은 이날 인천 전세사기피해지원센터 현장점검에서 “사기당한 피해 금액을 국가가 먼저 대납해서 돌려주고, 그게 회수가 되든 말든 떠안으라고 하면 결국 사기 피해를 국가가 메꿔주라는 것”이라며 “사기 범죄를 국가가 떠안는 선례를 대한민국에 남길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또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은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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