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 현장선 콘크리트관 아래 시민들 아슬아슬 통행
크레인서 벽돌 낙하 아래있던 20대 노동자·시민 사상
한국 법령엔 시민안전 위한 관리요원 배치 규정 없어
日선 작업자 1명 초미니 공사현장에도 안전요원 2명
“무슨 일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니냐” 시민생명 최우선
#1. 지난 11일 서울 성북구의 한 공사현장의 부실한 가림막이 가뜩이나 좁은 인도를 절반가량이나 차지해 시민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30대 최모씨는 “출퇴근길 때마다 지나는 길인데 소음이나 먼지는 차치하더라도 안전요원도 없어 사람이 몰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부터 앞선다”고 말했다.
#2. 지난달 4일 오후 압사 참사가 발생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신축 건물 공사 현장. 콘크리트펌프카가 콘크리트를 공사 현장에 붓는 커다란 팔 모양의 높이 5,6m 압송관(붐) 아래를 시민들이 아슬아슬 지나가고 있었다. 안전 설비는 물론 보행자의 통행을 유도하는 안전 요원 한명 없었다. 50대 김모씨는 “갑자기 머리 위로 압송관이 쓰러지거나 다른 낙하물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 겁난다”며 “이런 공사 현장에 안전 요원 한명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3. 지난 4월14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초등학교 앞도 사정은 비슷했다. 방과 후 걸음을 재촉하던 학생들은 자재와 공사 차량이 점령한 인도와 차도를 피해 이리저리 위태롭게 걸어 다녔다. 스쿨존(어린이 보호구역)이었지만 안전 요원은 보이지 않았다. 소형 포크레인이 인도를 사정없이 파헤치는 동안 어린 학생들은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도시 한복판의 중·소형 공사 현장에서 시민 목숨을 나몰라라이다. 현장의 안전 관리 실태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주변을 지나는 시민의 아까운 목숨을 위협하는 도심의 재앙 예정지가 되고 있다.
◆인명 피해 쌓이는데 통계조차 없어
지난 1월 부산 중구 남포동의 신축 건물 공사장에서는 타워 크레인에 실어 고층으로 옮기던 1.3t의 벽돌 더미가 15층 높이에서 50m 아래 바닥으로 쏟아지면서 20대 노동자가 벽돌에 맞아 숨지고 지나가던 40대와 60대 시민 2명이 다치는 참극이 발생했다.
재개발·재건축 등으로 도심 곳곳에서 아파트, 빌라, 주택, 상가건물 신축·철거 공사나 도로, 보도 공사가 계속되면서 이런 공사현장 관련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는 서울 종로구 효제동의 한 철거 현장에서도 가림막이 인도 쪽으로 기울어 길을 걷던 시민이 다쳤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건물 외벽이 떨어지면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림막 아래쪽이 기울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 3월29일 울산 남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선 37m 높이의 항타기(지반에 말뚝을 박는 장비)가 운전 중 넘어지면서 인근 4층짜리 원룸 건물 등 3개 동이 파손돼 임신부 등 5명이 다쳤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나 지자체는 공사장 내 안전사고가 아닌 주변 피해에 대해선 따로 통계조차 파악하지 않는다. 시민이 피해를 보더라도 지자체의 관리상 결함을 입증할 수 없어 중대시민재해 판정을 받기가 어렵다.
한국안전전문가협회 이송규 회장(기술사)은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공사장을 비롯한 작업현장의 안전 문제가 근로자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보니 보행자나 주변 시설 안전 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고 꼬집었다.
◆시민안전 위협하는 불법 주정차·적치물
작업현장 인근에서 시민이 맞닥뜨릴 수 있는 큰 위협 중 하나는 보행안전을 위협하는 불법 주정차와 적치물이다.
레미콘이나 덤프트럭, 지게차 같은 공사 관련 차량뿐 아니라 현장 인부 등 공사 관계자들이 타고 온 수십 대의 차량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행법은 도로에서 공작물이나 물건, 그 밖의 시설을 신설·변경·제거하거나 그 밖의 목적으로 점용하려면 관할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다. 경기지역 한 구청 관계자는 “대형 공사장에선 의례적으로 소음과 분진 관련 민원이 제기된다”면서도 “현장조사를 나가 불법 여부를 판단하는데, ‘과태료만 내면 된다’는 식의 반응이 다반사”라고 전했다.
서울의 한 자치구 관계자는 “몇 년 전 관내 소규모 공사장에서 용접 불꽃이 주변에 주차돼 있던 차량에 튀어 큰일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며 “공사장이나 철거현장 인근을 지나는 행인이나 주민이 민원을 넣지만 구청 입장에선 미리 단속하기가 어렵고 신고가 들어온 뒤에야 조처를 한다”고 설명했다.
◆시민안전 위한 관리요원 배치 규정도 없어
중소형 공사 현장에서는 시민의 안전을 관리하는 현장 요원을 따로 배치한 곳을 보기가 쉽지 않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이 법 시행령에 따르면 사업주는 사업장에 안전관리자를 의무적으로 둬야 하지만 공사금액 50억원 이하인 소규모 공사현장은 해당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그마저도 안전관리자가 꼭 현장 인근에서 행인 등의 안전을 지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산업재해 예방이 목적이라 사실상 시민을 위한 관련 규정은 전무한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안전 사무가 지자체 내 부서들에 혼재된 점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가림막 설치 등을 위한 점용 허가는 건축 관련 부서에서, 안전설비 등은 안전담당 부서에서 맡는다. 공사 차량 등의 주정차 문제는 도로 관련 부서에서 담당하는 식이다.
서울의 또 다른 구청 관계자는 “레미콘 같은 공사 차량의 경우 관련 법규가 애매해 민원이 들어와도 구청이 할 수 있는 조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이송규 회장은 “국내 공사·철거 현장은 가뜩이나 불법·저가 하도급이 만연해 인건비가 낮다”며 “안전교육이나 인식 역시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의무적으로 설치된 가림막도 먼지가 날리는 걸 막는 용도 외에 안전 측면에서 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라며 “관련 제도부터 엄격히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전문업체 활성화와 하도급 자제 유도 등의 대책을 제시했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소방방재학)는 미국·일본의 사례를 언급하며 안전교육이 특히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빨리빨리’ 문화가 만연한 현장에 대응해 세밀한 법·제도를 만들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일본, 공사장 입구·커브·경사로에 안전요원 배치
지난 1일 낮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구의 한 공원 앞 인도에서 작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작업자 1명의 초미니 현장임에도 안전요원이 2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안전요원 2명 중 1명은 보행자 안내, 다른 한명은 차량 유도를 맡고 있었다.
보행자 안내를 맡은 안전요원에게 안전요원이 2명이나 배치된 이유를 물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2차선 도로의 한 차로를 30m가량 막고 진행되는 도로 확장 공사 현장에는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안전요원만 6명이 있었다. 지나는 차량의 흐름을 통제하고, 공사 현장과 맞닿아 있는 보행로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는 의미로 가벼운 묵례와 함께 손짓으로 길 안내를 했다.
크든 작든 일본의 공사 현장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공사 현장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편을 최소화하고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보행자 안전과 차량의 원활한 흐름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공사현장에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식으로 시민 안전이 최우선인 것이다.
일본 국토교통성의 공사현장 사고방지를 위한 다섯 가지 중점적 안전 대책에는 ‘제3자의 부상·제3차량 등에 대한 손해’ 항목이 들어가 있다. 이와 관련한 제시된 구체적 실행 조치 중 첫 번째가 공사장 내·외부 안전 관리를 담당하는 교통유도원의 배치다.
교통유도원은 공사로 인한 교통사고나 차량 흐름 정체를 방지하고, 주민 생활에 대한 악영향을 줄이기 위해 배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특히 보행자의 안전 확보가 중요한 역할이다. 공사장 출입구, 공사 차량 이동 경로에는 있어야 한다. 공사구간 시작과 끝 지점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각 지점에 한 명 이상을 두도록 하고 있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교통유도경비업무검증을 통과한 1명 이상의 교통유도원 배치를 의무화하는 장소도 정한다. 지방자치단체별로 공안위원회가 결정하는 데 고속도로, 자동차전용도로가 많다. 이런 곳에서 공사할 때는 가파른 커브, 경사로의 시작, 중간, 끝 지점에 자격증을 소지한 유도원 1명씩을 배치해야 한다.
유도원 수, 배치 지점은 현장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사전에 현장을 제대로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경찰이 공사 허가를 낼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공사 발주업체, 수주업체에 대해서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한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사고 발생 시에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다. 발주업체는 안전관리 인력의 배치와 확보를 위해 적절한 비용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수주업체는 현장 상황을 미리 확인해 구체적인 안전관리 방안을 세우도록 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발주업체가 그 내용을 확인하고 사전안전지도가 불충분했다고 판단되면 수주업체에 엄격한 조치를 하도록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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