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학교 운동장 담장은 노란색으로 물들었지.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철봉 뒤 꽃밭에 아이들 키보다 두 배 높이로 쑥쑥 자란 해바라기. 언제 이리 자랐을까.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아이들도 덩달아 누가 누가 가장 크게, 활짝 웃는지 내기하자며 함박웃음 터뜨리던 기억들. 해바라기 백만송이 활짝 피어 노랑과 초록 물결 출렁이는 구와우 해바라기마을 꽃밭으로 걸어 들어가니 어린 시절 추억들 빛 바랜 앨범 넘기듯 한 장 한 장 소환된다.
◆백만송이 해바라기 만나러 갑니다
강원 태백시 황지동 구아우 해바라기마을로 들어서자 파란 여름 하늘과 하얀 물감을 여러 차례 겹쳐 칠한 듯 아주 짙은 하얀색 뭉게구름이 반긴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찜통더위가 몰려왔지만 태백은 좀 다른 세상이다. 전국 도시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평균 900m에 달해 아주 선선하고 쾌적하다. 그늘로 들어서면 여름인지 모를 정도. 장마는 미세먼지까지 모두 몰고 사라졌나 보다.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닦은 유리창처럼 맑고 투명한 공기가 가시거리를 무한대로 펼치니 만화속 풍경이 따로 없다.
태백답게 녹슨 철로 만든 조형물 ‘석탄 캐는 사람(서용선 작)’과 실제 갱도에서 사용했던 대형 환풍장치로 만든 조형물이 여행자를 맞는다. 별다른 도구 없이 모자와 곡괭이 하나로 석탄을 캐내던 태백 광부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해바라기 꽃밭 여행을 떠난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따라 해바라기 노란 물결이 파도치듯 끝없이 펼쳐지는 모습은 보기 드문 수채화다. 해바라기 사이사이에 벌써 연분홍 코스모스 피어 한들한들하고 주황, 빨강, 분홍 백일홍이 알록달록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꽃길만 걷게 된다. 해바라기가 아주 잘 자라는 곳인가 보다. 어른 키를 훌쩍 넘겨 2m도 넘어 보인다. 남친은 여친의 예쁜 인생샷을 찍어보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꽃밭 속으로 들어가면 푹 파묻혀 버려 사람과 광활한 백만송이 해바라기를 함께 담기 쉽지 않다. 그래도 연인들 삼각대 가장 길게 뽑아 올리고 해바라기만큼 활짝 웃으며 추억을 남기니 꽃보다 아름답다. 저 멀리 매봉산 능선을 따라 서 있는 하얀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날개를 돌리는 풍경은 덤으로 얻는다. 전망대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은 거의 평지이고 30분이면 충분해 햇볕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이라도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아홉 마리 소가 배불리 먹고 평화롭게 누워 있는 형상이라 구와우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바라기 축제를 시작한 곳으로 올해 19회째를 맞았다. 해바라기 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구와우마을 축제위원회와 태백 구와우 영농 조합법인에서 주관하는 축제는 이달 15일까지 열린다. 해바라기가 메인이지만 코스모스, 백일홍을 비롯해 야생화 등 다양한 꽃 300여종 지천으로 피어 가슴은 어느새 화사한 꽃으로 물든다. 태백해바라기축제는 느긋하게 즐겨야 진가를 알게 된다. 곳곳을 꾸미는 이름 없는 조각 작품들과 해바라기밭 연못, 돌담길 정원도 낭만을 더한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해를 보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후 들어 해는 서쪽으로 향해가고 있는데 해바라기 머리는 대부분 동쪽으로 고정돼 있다. 어찌된 일일까.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간다는 건 잘못 알려진 상식이다. 중국어 이름 ‘향일규(向日葵)’를 그대로 우리말로 풀어 쓰면서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 실제 해를 따라가긴 하는데 딱 꽃이 피기 전까지만이다. 봉오리를 피우는 영양소 합성을 위해 줄기 윗부분이 해를 따라가지만 꽃이 피고 나면 동쪽으로 고정이다. 따라서 순광으로 해바라기 얼굴이 담긴 최고의 사진을 얻으려면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오후에 가면 역광이라 낭패보기 십상이다. 그런데 해바라기 뒤통수면 어떠랴. 파란 하늘 아래 샛노란 물결은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다.
해바라기 꽃말은 기다림. 여러 신화에서 해바라기가 등장한다. 여신에서 인간으로 신분이 떨어진 클리티에가 태양신 헬리오스를 사랑했지만 아프로디테에게 저주를 당한 헬리오스는 레우코테아란 공주에게만 관심을 둔다. 질투에 눈이 먼 클리티에는 레우코테아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그녀 아버지에게 거짓으로 일러 바쳤고 레우코테아는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헬리오스가 클리티에를 사랑하게 됐을까. 아니다. 클리티에의 소행이란 사실을 알고 화가 치밀어 욕설만 퍼부었을 뿐. 결국 클리티에는 헬리오스를 기다리다 외롭게 굶어 죽고 그 자리에 핀 꽃이 바로 해바라기다.
행사 기간 동안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버스킹 공연과 7080 콘서트, 할아텍 이태량 작가 그림 전시, 야외 조각 작품전, 구와우공공미술프로젝트 구와우 환경조각 전시 등 다양한 전시공연행사가 마련된다. 산양 먹이주기 체험, 숲해설 프로그램, 다육식물 심기체험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와 지역 특산품 판매장도 운영돼 재미있는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다.
◆배추고도 귀네미마을을 가보셨나요
배추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채소가 또 있을까. 김치는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국인의 ‘솔푸드’이니 말이다. 외국에 나가면 현지식만 즐긴다는 이들도 타지생활 일주일이 넘어가면 얼큰한 김치찌개가 간절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입맛 없을 때 어머니 손맛 가득 담긴 김장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 없어도 밥 한 그릇 뚝딱 비어진다. 묵은지는 또 어떤가. 냉장고에서 시큼해진 묵은지 꺼내 냄비에 담아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거나 참치 한 캔 따서 넣어 보글보글 끓이면 요리솜씨 형편없는 이들도 맛있는 김치찌개가 완성된다.
전국 곳곳에서 배추가 생산되지만 해발 700~1200m 고지에서 생산된 태백 고랭지 배추로 만든 김치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홀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큰 일교차 덕분에 아삭아삭한 식감이 뛰어나고 고소하면서 단맛이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태백의 고랭지 배추 재배 면적은 축구장 면적의 630배인 450㏊에 달할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랭지 배추를 생산한다. 보통 배추는 겨울철 김장용으로 많이 재배되지만 태백 고랭지 배추는 여름용으로 7∼10월에 출하된다. 이런 태백의 고랭지 배추를 대표하는 생산지가 해발고도 1000m에 달하는 삼수동 귀네미마을이다. 강원 삼척시 신기면의 환선굴 바로 위에 있는데 마을을 감싸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아 우이령이라 부른 데서 귀네미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산으로 오를수록 고도 때문에 귀가 먹먹해진다. 코를 잡고 불기를 서너 차례 하자 ‘배추고도‘라 적힌 안내문이 귀네미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산길을 좀 더 올라 정상에 섰다. 배추밭이 이렇게 아름답던가. 마을을 둘러싼 가파른 산을 물결치듯 뒤덮고 있는 고랭지 배추밭의 이색적인 풍경이라니. 마침 하늘이 맑고 푸르러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언덕을 보는 듯하다. 여기에 능선을 따라 힘차게 날개를 돌리는 하얀 풍력발전기까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더한다. 귀네미마을은 정감록에 피난처로 기록된 마을이다. 태백쪽에서 올라오는 외길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강원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역에 살던 37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해 1988년에 마을이 형성됐다. 배추밭 풍경도 유명하지만 겹겹이 쌓이며 멀어져가는 거대한 산맥 사이로 동해에서 떠오른 장엄한 일출 풍경도 손에 꼽힌다.
강원도에 왔으니 메밀국수와 감자전을 빼놓을 수 없다. 현지인 맛집으로 소문난 메밀명가 강산막국수에 자리 잡고 물막국수, 비빔막국수, 수육에 감자전까지 주문한다. ‘겉바속촉’으로 노릇노릇하게 부친 감자전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 한 젓가락 입안으로 밀어 넣으니 구수한 감자맛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역시 감자는 강원도다. 직접 뽑은 메밀면 위에 채 썬 오이를 고명으로 얹은 물막국수는 슴슴한 국물맛이 일품으로 입맛 없을 때 생각 날 것 같은 맛이다. 고추장 쓱쓱 발라 먹는 비빔막국수에 수육 한 점과 콩나물 올려 먹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가 입에 걸린다. 태백=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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