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매장풍습 실증 역사적 가치
“체계적 조사·글로벌 홍보 필요성”
가야는 기원 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다. 경남 김해 금관가야를 비롯해 경북 고령 대가야, 함안 아라가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가야고분군은 가야 문화의 성립과 발전,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겨진다. 과거 ‘연맹’이라는 독특한 정치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주변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와 함께 존재했던 가야 문명을 실증하는 증거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사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가야에 관한 기록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현저히 적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역사 지리서인 ‘동국지리지’가 가야사 복원을 시도했고, 정약용(1762∼1836) 같은 실학자들이 가야사를 연구했지만, ‘미지의 왕국’ 혹은 ‘사라진 역사’라는 인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을 조사한 성과가 쌓이면서 가야의 존재가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가야의 옛 무덤, 즉 고분군이 있었다.
문화재위원회의 세계유산분과위원인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가야 고분군 등재는1∼6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철기 문화를 완성하고 국제 교류에 나섰던 가야 문명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라고 봤다. 강 교수는 고분군 7곳에서 볼 수 있는 가야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했다. 그는 “고분군을 만드는 방식, 부장 유물, 묘제(墓制·묘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시스템 등을 보면 일련의 공통점이 발견된다”며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함께했던 가야의 연대 정신”이라고 짚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을 지낸 박종익 전 소장은 등재된 고분군 가운데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63호 무덤을 주목할 만하다고 밝혔다. 창녕을 거점으로 삼은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자가 묻힌 묘역은 당시 도굴 흔적이 없는 상태로 발견돼 무덤의 축조 기법과 장송 의례 등을 온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박 전 소장은 “발굴 조사를 하던 중 틈 사이로 온전하게 유물이 놓여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며 “가야 고분군은 당시 문화와 매장 풍습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가야에 대한 체계적인 추가 연구·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분군 7곳은 가야 고분 전체 중 일부”라며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체계적인 연구·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 세계 관람객이 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과 홍보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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