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학살이 일어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빅터 플랭클이란 정신과 의사가 수감돼 있었다. 인간 정신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자다.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수감자들과 경비원들이 보인 서로 다른 반응을 관찰한 뒤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어떤 인간은 고결하고, 어떤 인간은 비열하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은 누구나 비열해질 수 있다. 가진 게 많건 적건, 살아온 날들이 길건 짧건 적절한 조건만 갖춰지면 우린 자신의 비열함을 아낌없이 내보일 테다. 그렇다면, 비열함의 조건은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대개 선, 윤리, 도덕이라 불리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어길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은 괴롭다. 올해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의 주인공이자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가 그랬다. 영화의 원작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옥문을 열었다는 자책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망각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다. 잊어버림으로써 책임지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원하고, 시도한다. 숨 막히는 죄책감을 반기는 자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우린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세상에서 망각이라는 동굴로 숨어들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문제는 권력자의 비열함이다. 망각의 희생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손에 쥐고 있는 게 많은 만큼, 잊는 것도 많다. 누군가의 죽음도 그중 하나다. 100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 간 전쟁이 그렇다.
하마스 지도부는 지난 10월7일 이스라엘을 공습하며 살육전을 펼쳤다. 하루도 안 돼 11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에서 120명이 넘게 살해당했다. 이스라엘도 곧장 가자지구에 폭격을 퍼부으며 공격에 나섰다. 무자비한 민간인 테러가 이어졌다. 이곳에선 지금 막 태어나 힘겹게 첫 숨을 내뱉은 갓난아기도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킨 하마스 지도부는 자취를 감췄다. 이들이 피가 낭자한 가자지구가 아닌 카타르의 5성급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매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울부짖는 가자 주민들은 잊어버린 채 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하마스 전쟁이 터진 뒤 이 지역의 인도주의적 재앙을 깊게 우려한다고 말했다. 아동의 피해는 끔찍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사실은 까먹은 듯 보였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올해 초 푸틴에게 아동 납치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기도 했다.
내년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40억명이 투표소로 향한다. 미국, 러시아, 인도 등 40여개국에서 선거를 치른다. 한국도 4월 총선이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새로운 권력자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권력이라는 달콤함 외의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이들이 또다시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하는 건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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