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9시간 걸쳐서 고강도 조사
“마약자백 유도, 시대착오적 방식”
사망 전날엔 거짓말 탐지기 요청
“방송 등 범죄 보도 방식 돌아봐야”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48)씨가 27일 서울 시내 공터에 주차된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연예인 마약 수사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과도한 선정주의가 죽음을 부추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앞서 그룹 빅뱅 출신 지드래곤(본명 권지용·35)의 경찰 수사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약이 의심된다’는 영상이 무분별하게 퍼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사회적 낙인찍기’를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은 이날 오전 10시12분 이씨 매니저로부터 ‘유서 같은 메모를 작성하고 집을 나섰다’며 ‘어제까지는 연락이 됐지만 차량도 없어졌다’는 내용의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매니저는 이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이씨 거주지를 찾아간 뒤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색에 나선 경찰은 오전 10시30분쯤 서울 성북구 성북동 한 사유지 공터에서 이씨의 차량을 발견했다. 차 안에 있던 이씨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소방 관계자는 “사망한 것으로 판정돼 (치료를 위한) 병원 이송은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씨 시신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씨 차량은 서울 성북경찰서로 견인됐다.
이씨의 마약 투약 혐의를 수사해온 경찰은 그가 사망함에 따라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마무리할 전망이다. 공소권 없음은 불기소 처분의 일종으로, 피의자가 사망해 기소할 수 없는 상황 등 수사 실익이 없다고 판단될 때 내려진다. 이번 사건 관련 다른 피의자들에 대해선 절차대로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이씨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상 대마·향정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지난 9월부터 연예인 등이 연루된 마약 사건을 수사해온 경찰은 서울 강남 유흥업소 실장 A씨로부터 이씨가 A씨의 집에서 마약을 투약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그를 대마·향정 혐의로 입건했다.
이씨는 지난 10월28일 첫 경찰 소환 조사 당시 소변을 활용한 간이 시약 검사를 받고 1시간 만에 귀가했다.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일주일 뒤 경찰에 두 번째로 출석한 이씨는 3시간가량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모발 등을 채취해 진행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정에서도 음성 판정이 나왔다. 당시 이씨는 “A씨가 나를 속이고 약을 줬다. 마약인 줄 몰랐다”며 자신의 마약 투약 혐의에 관한 입장을 처음으로 경찰에 진술했다.
경찰은 이달 23일 이씨를 세 번째로 불러 이튿날 새벽까지 19시간에 걸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이씨가 A씨 등 여성 2명을 공갈 혐의로 고소한 사건의 피해자 진술도 받았다. 사망 전날 이씨는 변호인을 통해 경찰에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추가로 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A씨와 함께 공갈 혐의를 받는 B씨를 이날 체포했다. B씨는 전날 인천지법에서 진행된 영장실질심사에 별다른 사유를 밝히지 않은 채 돌연 불출석했다. B씨는 이씨를 협박해 5000만원을 뜯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의 사망 소식에 경찰이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을 무리하게 수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 교수는 “마약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니까 경찰이 유흥업소 건을 압박해서 마약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을 수 있다”며 “일종의 ‘별건 수사’인데 시대착오적인 방식”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마약 혐의를 입증할 과학적 증거가 없어도 교차 진술이 있다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는데, 이제 재판부는 자백만으로 혐의가 입증됐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설명이다.
앞서 경찰은 지드래곤도 마약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가 소변과 체모 등 마약 정밀검사에서 음성 판정이 나오자 최근 권씨를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한 바 있다. 이 또한 A씨의 진술에만 의존한 부실한 수사였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경찰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전날 기자간담회 서면답변에서 “구체적인 제보를 바탕으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관련자 조사, 국과수 감정 등 필요한 수사를 진행했다”며 “불송치됐다고 해서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찰 수사뿐 아니라 언론의 범죄 보도방식을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는 “범죄 보도는 사회에서 어떤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고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에 대해 공권력은 어떻게 행사되고 있고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살핀다는 점에서 공적 관심사에 부합한다”면서도 “그러나 공영방송이 ‘단독’까지 달고 보도한 이씨와 A씨의 통화 내용은 사적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누가 더 많이 까발리냐’식 보도를 경쟁하는 언론 행태는 정당한 범죄보도에 대한 인식까지도 나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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