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환위기로 실직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전 재산 1억원으로 작은 무역회사 세워
우크라이나 제과공장에 한국산 사탕 포장지 납품 사업으로 시작
사탕 포장지 문제로 발생한 막대한 배상금 성실히 갚아 나가며 쌓은 신뢰, 사업 성공의 원동력 돼
필름·자동차 부품·플랜트 등 사업 품목 확대하며 2008년 매출 1조원 달성하기도
기업 이윤, 문화예술 후원 등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 환원…한국 문화예술(인)의 우수성도 해외에 알려
경영에 예술을 접목한 ‘경영 예술’ 전도사, “문화예술은 우리 삶과 사회에 꼭 필요한 피와 같다”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42년 역사의 첫 유럽 출신 회장
“월드옥타가 대한민국을 세계 중추 국가로 만드는 데 첨병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할 것”
“우리 청년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회피하기보다 직시하고 대응하길”
지난달 17일 오스트리아 빈(비엔나) 국제공항 라운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박종범(66) 영산그룹 회장은 흐뭇한 경험을 했다. 어떤 한국 청년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한 것이다. 박 회장이 이름을 묻자 청년은 ‘WCN 장학생’인 박주성(30)이라고 소개했다. 세계적인 빈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에서 베이스 바리톤으로 활동하는 성악가였다. WCN(월드컬처네트워크)은 박 회장이 문화와 예술로 가치 있는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2012년 빈에 설립한 문화예술기획사다. 아내 송효숙(62)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한국의 문화 교류에 앞장서고, 한국의 재능 있는 신인 음악가를 발굴해 장학 사업과 국제 무대에 서는 기회 등 다양한 지원활동을 한다. 2019년부터 세계 최고 명문 악단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도 전담한다.
박주성이 “회장님 덕분에 빈 슈타츠오퍼의 정식 단원이 되고, 가정도 꾸릴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하다”며 서울시립교향악단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가는 길이라고 하자 박 회장은 뿌듯했다. 박주성은 나흘 뒤 명장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송년 공연 ‘베토벤 합창 교향곡’ 무대(롯데콘서트홀)에 올랐다.
앞서 WCN은 박주성이 2021년 빈 슈타츠오퍼의 젊은 예술가 양성 프로그램에 한국인 최초로 합격해 2년간 매진할 수 있도록 재정 등 많은 뒷받침을 해줬다. 이후 그는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아 빈 슈타츠오퍼의 정식 단원이 된 영광을 안았다.
다음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한 박 회장은 “박주성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다”며 싱글벙글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1998년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 혈혈단신으로 유럽에서 성공한 기업가라기보다 문화예술의 가치와 효용에 진심인 키다리 아저씨 같았다. 경영에 예술을 접목한 ‘경영 예술의 전도사’로도 잘 알려진 박 회장은 문화예술을 우리 삶에 꼭 필요한 ‘피(혈액)’에 비유했다. “사람들을 웃거나 울게 하면서 삶을 가치 있고 여유롭게 하는 게 결국 문화예술인데 이게 없거나 부족한 사회는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 어디를 가든 문화예술 쪽은 가난해요. 순수 예술 분야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데를 기업들이 충분히 뒷받침 해주면 문화예술이 사회의 피를 더 맑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해당 기업 이미지도 당연히 좋아지고, 그 회사 제품에 대한 호감도 역시 높아질 겁니다. 우리 회사(영산그룹)가 그랬어요.”
영산그룹은 문화예술 후원 외에 우크라이나 난민 돕기, 아프리카 식수난 해결을 위한 우물 파주기 사업, 러시아 연해주의 민족학교 지원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 회장의 경영 철학인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적인 삶’, ‘더불어 사는 인간적인 삶’,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과 맞닿아 있다. 두 달 전 재외 동포 최대 경제단체인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의 제22대 회장으로 취임한 후 대한민국의 ‘경제 영토’를 확장하는 디딤돌 역할도 하고 싶다는 그를 강서구 월드옥타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떻게 기업가가 됐나.
“어렸을 때 꿈이 판사여서 서울의 한 법대에 지원했는데 시험에서 떨어졌다. 농부였던 아버지가 ‘고시(사법시험) 공부를 하러 들어가야 하는 대학에도 못가면서 무슨 고시를 보러 하느냐”고 해 조선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사시 대신 행정고시를 준비하면서 연세대 행정대학원까지 다녔지만 고시는 내 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뒤늦게 카투사를 전역한 뒤 대성그룹에 입사해 해외사업부 일을 맡았다. 1990년 기아자동차로 옮겼고, 1996년부터 기아차 오스트리아 법인에서 일하다 IMF 사태가 터져 결국 개인 회사를 세웠다.(당시 기아차는 현대차에 인수합병됐다.)”
―막막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회사를 차렸나.
“귀국해봐야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실업자가 될 게 뻔한데, 오스트리아는 어쨌든 선진국이고 애들 학비가 무료여서 빈에 무작정 남았다. ‘식당에서 접시 닦기를 하든 무슨 일을 해서라도 식구들 못 먹여 살리겠냐’는 마음으로. 1999년에 전 재산 1억원을 자본금으로 독일어 통역이 가능한 직원 한 명 둔 작은 무역회사 ‘영산한델스(Handels·무역)’를 차렸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독일 모두 이미 잘 짜여진 조직 사회라 독일어도 잘 못하고 영어 좀 떠듬떠듬 하는 내가 비집고 들어가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사명 ‘영산’은 고향(옛 전남 광산군 대촌면)의 영산강과 그의 가톨릭 세례명 ‘카르멜로(영산·靈山)’에서 따 왔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사업을 일군 과정이 궁금하다.
“1999년∼2000년 러시아에선 내가 한국 제품 수출 계약을 어렵게 따내도 한국의 종합상사들이 가로채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국 종합상사가 진출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로 갔다. 1년에 220일 정도를 빈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우크라이나와 체코, 슬로바키아 등에서 살다시피 했다. 첫 사업은 우크라이나 제과공장에 한국산 사탕 포장지를 납품하는 거였다. 그러다 한국의 인쇄 업체 잘못으로 포장지 품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서 손해배상으로 163만달러를 물어야 했다. 그 당시 20억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한 달에 2만달러도 벌지 못하던 때라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빈으로 도망가버리면 끝이었지만, 바이어(수입상)에게 ‘어떻게든 갚겠다’고 약속한 뒤 2년 만에 다 갚았다. 성실하게 갚아 나가니 그쪽에서 (배상금을) 깎아주기도 했다.(당시 쌓아 올린 신뢰는 사업 성공의 원동력이 된다.)”
―2008년에는 연매출 1조원도 달성했다고.
“이후 카메라 필름과 원목용 PVC 필름 등 우리 대기업들이 만든 석유화학 제품을 가져다 팔았는데 품질이 좋아 잘 팔렸다. 우크라이나 필름 시장의 55%가량을 점유할 정도였다. 또 우크라이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승용차 수요가 급증할 때 오스트리아 현지 은행을 설득해 우크라이나 자동차 대리점들이 한국 자동차를 제때 수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게 번 돈으로 자동차 부품 등 사업 품목을 확대하면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회사가 급성장했다. 하지만 1조원까지 간 연매출 규모가 2008년 10월 리먼·브라더스 금융위기 여파로 2000억∼3000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차츰 회복해서 현재는 6000억원 규모다.”
영산그룹은 현재 한국의 서울법인과 전주·김해 공장을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20개국에 28개 법인·공장을 두고 자동차 부품, 완성차 조립, 플랜트, 식자재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박 회장은 요즘도 한 달에 20차례가량 비행기를 타고, 1년에 200일 이상 해외 출장 일정을 소화한다.
―지난해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사업에 미친 영향은. 전쟁 난민도 돕는다고.
“그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코로나19 때도 위기가 있었지만 전쟁 충격이 가장 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없었다면 사세가 지금보다 2∼3배는 커졌을 거다. 전쟁 전에 우크라이나 공장을 철수하고 러시아로 다시 들어가 많은 돈을 들여 플라스틱 사출 공장과 사출물 도장 공장 등 5개 공장을 지었는데 전쟁으로 모두 가동이 중단돼 손실이 엄청났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기업인이 어려운 처지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등으로 전 세계적 공급망이 흐트러지거나 재조정되고, 고물가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슬로바키아로 피난 온 우크라이나인 30명을 슬로바키아 공장에 취업시키고 현지의 내 집을 숙소로 제공했다. 다만, 회사가 양국 모두와 관계가 깊다 보니 전쟁 상황 자체에 마음이 아프다.”
―문화예술 후원에 관심 가지게 된 계기는.
“2005년 우크라이나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부터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등 사업체가 있는 지역에서 현지 주요 교향악단과 한국 음악가들이 함께 하는 친선 음악회를 꾸준히 마련해 줘 호평을 받았다. 해외 소비자들이 한국 문화를 많이 접하면 한국산 제품에도 친숙해진다. 그래서 기업 브랜드와 한국 제품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문화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 빈 필과 빈 국립음대, 빈 박물관 관장 등 (본사가 있는) 빈의 국공립 예술기관장들을 만나보니 여기도 어려운 형편들이라 후원금을 내면서 가까워졌다. 2010년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회장을 맡아 2년 뒤 숙원사업이던 한인문화회관을 건립한 후 한국 음악가들 후원도 본격화했다. 제대로 하려고 아내가 한인문화회관 관장과 WCN 대표를 맡아 책임졌다. 빈으로 음악 공부를 하러 온 한국 유학생들이 재능이 있어도 무대에 서기 어려운 현실이었기 때문에, 먼저 문화회관에 이들의 연습 공간과 연주 무대를 마련했다. 빈 슈타츠오퍼와 베를린 슈타츠오퍼 등이 한국인 유망주 한 명을 뽑아 내부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데 드는 비용도 전액 지원했다. (박주성처럼) 연수 과정에서 인정 받으면 정식 단원으로 채용되기도 한다.”
영산그룹과 WCN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빈 필과 빈 필 아카데미, 빈 심포니, 빈 슈타츠오퍼, 베를린 슈타츠오퍼 등 세계적 음악축제와 예술단체의 주요 후원자다. 이 밖에 네팔 지진 등 세계 각지의 대형 재난 피해 현장과 아프리카에서 진행된 ‘평화의 샘물’ 파기 사업 후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기념관의 고려인 학교 후원 등 사회공헌 활동도 열심히 한다.
―월드옥타 42년 역사상 최초의 유럽 출신 회장으로 뽑혔는데. 왜 나섰는가.
“1981년 ‘한국산 제품을 전 세계에 팔아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월드옥타는 현재 전 세계 68개국에 146개 지회가 있다. 회원도 정회원 7000여명과 (월드옥타 주관 창업무역스쿨 출신) 차세대 3만2000여명 합쳐 총 3만9000명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대한민국의 ‘경제 영토’를 확대하는 최일선에 월드옥타 회원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월드옥타가 우리나라를 세계 중추 국가로 만드는 데 첨병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내가 쌓아 온 경력과 노하우(비법), 인맥을 활용해 월드옥타를 한 단계 더 향상시키고 싶었다. 경제 영토 확대가 고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해서. 한국 위상이 높아지고 우리 문화에 제품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은 시대에 해외한인경제인(한상)들이 더 큰 활약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싶다.”
―2년 임기 동안 진행할 역점 사업은 무엇인가.
“우선 정부 위탁 사업도 여럿 수행하는 만큼 업무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고, 월드옥타 체제도 재정비하고 혁신하려 한다. 또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국 중소기업과 신생기업(스타트업)하고 회원 간 협력 관계를 확대해 이들 기업과 제품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는 10월 빈에서 예정된 월드옥타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한국 상품 유럽 박람회’로 활용하고 싶다.
일찍 해외로 나가 고생 끝에 자리잡은 은퇴(임박) 세대 중 귀국을 원하는 회원이 상당한데, 이들이 건실한 국내 중소기업에 투자하고 경영 비법을 전수하면서 정착하게 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특히, 한반도 주변 4강과 북한까지 합쳐 (월드옥타가 주도하는 민간 차원의) 한·미, 한·일, 한·중, 한·러, 남북 경제포럼위원회(가칭)를 추진해 우리 기업들의 각종 해외 사업 걸림돌 해결에 나설 계획이다. 아울러 월드옥타의 역할과 중요성에 비해 정작 한국 내에서 인지도가 낮고 저평가 된 문제도 개선하고 싶다. 대한민국 7대 경제단체로서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인정받도록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 청년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준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회피하기보다 직시하고 대응했으면 한다. 어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리라 마음 먹으면 해법이 나온다. 피하면 절대 안 된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선진국만이 아니라 중동,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가보면 아직 블루오션이 많다. 처음 얼마 동안은 힘들겠지만 부딪히다 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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