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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가 만리길 간다”… 고향 어르신들의 삶 엮는 공동체 ‘추억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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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1-03 11:24:55 수정 : 2024-01-03 11: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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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고생길도 마다치 않고 질긴 생을 이어가며 행복 역습니다”

 

조선 세종 때 간행한 용비어천가 2장에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곳 됴코 여름 하나니’란 글귀가 있다. 이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는 뜻이다.

충북 음성군에서 지역 어르신들의 구술생애사를 책으로 펴낸 ‘추억의 뜰’ 공동체를 운영하는 김경희, 반연숙 공동대표가 지난 2023년 12월 29일 음성읍의 한 카페에서 그동안 펴낸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윤교근 기자

개인의 뿌리, 우리 사회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안고 나와 지역의 뿌리를 찾으려는 공동체가 있다. 충북 음성군에서 ‘추억의 뜰’ 공동체를 운영하는 김경희(57), 반연숙(57) 공동대표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9년 전 평범한 주부로 만나 자서전을 매개로 2년 전 음성군에서 ‘추억의 뜰’을 공동 창업했다. 이 공동체엔 퇴직한 공무원과 교사 등 10여명이 함께 활동한다.

 

◆“어르신들이 마른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했다”

 

한해의 끝자락인 지난달 29일 음성읍 한 카페에서 두 대표를 만났다. 두 대표가 건넨 명한 뒤엔 사람의 향기가 만리를 간다는 뜻의 ‘인향만리’가 적혀있었다. 김 대표는 “어르신들의 삶을 살피며 삶과 문화, 지역이 생성되는 과정까지 생생하게 남길 수 있게 됐다”며 “후손인 개인은 물론 지역 사회의 본류를 찾는 인문학 과정이 어르신들의 자서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개인보다는 지역으로 접근해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구술생애사’를 펴냈다”고 덧붙였다. 구술생애사는 사람 삶을 이야기로 듣고 기록한 개인의 역사서인 셈이다.

충북 음성군 ‘추억의 뜰’ 공동체가 최근 펴낸 구술생애사 은빛그리움 등 어르신 자서전. 윤교근 기자

추억의 뜰은 지난달 초 ‘집안의 철학자 은빛그리움’이란 구술생애사를 발간했다. 김 대표는 “음성군에서 40년 이상 거주한 어르신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충북도 마을공동체 공모사업으로 ‘마을 어르신 자서전 사업’에 선정돼 이야기를 듣고 원고를 작성하고 영상까지 담았다”고 전했다.

 

그는 “어르신들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자기만족으로 자서전 만들기를 시작했다”며 “어르신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반응을 보였고 때론 마른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했다”고 전했다. 또 “1930년대 언저리에서 태어난 어르신들의 삶이 처음으로 대접받았다는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충북 음성군 구술생애사에 담긴 권명화 할머니의 가족사진. 추억의 뜰 제공

◆“살아가니 살아지더이다”

 

#“권명화(82) 할머니는 스무 해 갓 넘어 대식솔 장손인 맏며느리로 시집왔다. 설상가상으로 지아비를 병환으로 먼저 보내고 아내보단 어머니의 이름으로 1남 2녀의 생계를 안고 노심초사 고된 시련으로 쉼 없이 살아내야만 했다. 고된 삶의 연속을 이어왔던 권 할머니는 백발이 성성한 생의 한복판을 지르밟고 건너와 보니 굽어지고 휘어진 길 차마 버리지 못한 소풍 같은 날들이었다”

 

#“정동춘(83) 할머니는 장롱에 탑을 이룰 정도로 일기를 썼다. 자녀들도 어머니의 일기가 얼마인지 몰랐다. 그 속엔 30년 월급봉투, 보험증권 등이 함께 있었다”

 

#“최순옥(89) 할머니의 본명은 김순옥이다. 최 할머니가 16살 때 6·25로 개성에서 피난을 내려오다 경기 의정부쯤 도착해 쉬는 도중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푸르던 옥수수밭이 붉게 물들며 6명의 가족이 모두 죽어 함께 피난을 오던 동네 아저씨가 거둬 살면서 성을 바뀌었다”

충북 음성군 구술생애사에 담긴 정동춘 할머니 18살 때 서울서 친구와 찍은 사진. 추억의 뜰 제공

김 대표는 자서전에 담긴 할머니들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음성군의 9개 읍·면 어르신들 인생록을 만들어 가며 경남 진주시의 ‘어른 김장하’ 같은 분을 찾으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른 김장하’는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기부와 장학사업 등 그의 선한 영향력이 알려지면서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제목의 책을 비롯해 영화로도 선보이며 묵직한 울림으로 주고 있다. 

37살이 숨을 거둔 고 이규성 할머니와 아들들. 추억의 뜰 제공

아들이 직접 어머니의 삶을 구술해 책을 엮기도 했다. 고 이규성 할머니는 22살 때 가장 역할을 하며 경제활동에 나서는 등 속앓이와 몸 고생으로 50년 전인 37살에 숨을 거뒀다. 그의 삶은 아들의 육성으로 전해져 책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이 할머니의 아들 류홍천(64)씨는 “책을 만드는 것은 꿈도 못 꿨다”며 “돌아가신 지 50년 돼서 흑백사진 몇장 남아 그것으로 그리움을 달랬는데 자식 된 도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다”고 말했다.

정동춘 할머니의 일기장엔 자손들도 모르는 30년전 월급봉투와 보험증권 등 지역의 역사가 함께 보관돼 있었다. 추억의 뜰 제공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도 엿본다. 반 대표는 “대부분 할머니는 이야기 끝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고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한다”며 “살아가니 살아지더이다는 한 할머니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고 했다. 이어 “어르신들의 삶은 개인의 역사이자 고스란히 지역의 역사이고 문화”라며 “이런 소중한 인문학적 뿌리 자원을 정부 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음성=윤교근 기자 sege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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