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대북확성기 재개시켜
폐쇄된 北에 자유세계 정보전달
인터넷·방송 등 다양한 수단 필요
현대의 전쟁은 회색지대에서 수행된다. 러시아는 총알 한 발 쏘지 않고 크름반도를 병합했고, 핵심이익이 연계된 국가라면 여론조작과 선거개입을 서슴지 않는다. 중국은 한류와 유커를 통제하며 한반도 사드배치를 보복해왔고, 대만을 겨냥한 군사훈련을 지속한다. 이란은 예멘이나 시리아의 반군세력을 조종하여 수니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압박한다. 인명 희생을 감수하고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는 전쟁은 현대에서는 하수(下手)의 전략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의 흑백지대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뒤섞인 회색지대가 현대전의 전장이다.
회색지대 분쟁은 패권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강대국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외교, 정보, 군사, 경제 등 국력의 핵심요소를 통해 패권을 유지한다. 그런데 집권세력의 권력 유지가 국가적 목표인 전제정권에는 활용방식이 지극히 노골적이고 거칠다. 국제질서 무시는 기본이고, 표적국가에 대하여 대리전, 정부전복, 정보조작 및 여론공작, 심지어는 선거개입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면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자유민주국가들은 불법행위도 기꺼이 포함해야 하는 회색지대 전술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과 러시아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의 회색지대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공산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의 본성까지 바꿔온 전통을 가진 이들에게 권력의 원천은 여전히 정보통제와 조작이다. 전 국민을 ‘가스라이팅’하여 이권과 권력을 유지하며, 당연히 정부가 승인된 메시지 이외에는 대중에게 소통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국의 여론형성을 위한 소통망은 폐쇄시켜 놓고 상대국의 여론과 민심을 흔든다.
이러한 회색지대의 싸움은 강대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특히 한국은 지금도 매일 회색지대에서 싸우고 있다. 한반도에 회색지대 분쟁이 없었던 시기는 더 큰 전쟁이 일어났던 6·25전쟁뿐이다. 청와대 기습사건이나 공작원 및 무장공비 침투, 우리 어민들의 피랍, 군사분계선(DMZ)과 북방한계선(NLL)에서의 수많은 충돌과 위협, 핵과 미사일 시험 등을 집계하면 최소 5000회 이상이다.
북한은 최근 오물풍선이라는 새로운 회색지대 공격수단을 추가했다. 우리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4차례에 걸쳐 4900여 개의 오물풍선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 중 1600여 개가 우리 영토에 낙하했는데, 폐지와 폐건전지는 물론 분변과 다름없는 거름까지 포함됐다. 대북전단은 자신들에게는 오물과 같은 것이니 계속되면 한국도 똑같은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오물풍선으로 남남갈등을 부추겨 우리 국민들이 대북전단을 혐오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대북심리전 자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애초에 다른 나라에 보복으로 오물을 보낸다는 생각은 국가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저열한 수준의 대응이었다. 게다가 오물투척이라는 수준 낮은 행위로 인해 오히려 북한에 대한 국민적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이다. 또한 북한이 이렇듯 이성을 잃은 대응에 나선 것은 저들이 진실의 전달에 민감하고 취약한지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한편 북한의 오물풍선 도발에 대응하여 우리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이다. 대북확성기는 2018년 후 무려 7년간 작동되지 못했지만, 재개 결정 1주일 만에 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여 방송을 시작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달하는 평화로운 수단을 통한 대응으로 대한민국은 최근 충돌에서 더욱 큰 명분을 얻었다.
전제국가와 자유민주국가의 대결이 회색지대에서 수행되면 될수록 가짜뉴스와 온라인 루머에 의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북한이나 그 주변국 등 수정주의 진영은 우리의 인식과 판단을 흐리고 내부로의 붕괴를 꾀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팩트체크와 합리적 이성으로 해답을 찾아 우리 내부로는 단결하고 적은 혼돈에 빠트리는 인지전을 수행해야 한다. 대북전단과 확성기 이외에도 방송과 인터넷 등 다양한 회색지대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진실만이 북한을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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