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 등 69편 묶은 일곱 번째 신작
표제시 ‘… 사랑한 적’ 기차 여행 중 생각
“한 문장 떠오르니 ‘무슨 때’ 켜켜이 쌓여”
세태 꼬집는 듯한 시편 ‘줄’도 눈길 끌어
“사회, 비굴해지는 사람 잘살게 디자인
‘줄’ 서봤자 비굴해지는 것은 안 바뀌어”
회랑을 따라 사랑을 표현한 로맨틱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 역시 풍경화처럼 인상적이었다. 노부부도 그렇고, 혼자 온 어르신도, 가족들도 모두. 풍경과 사연을 주렁주렁 달고 온 듯 보인다. 관람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직원 같기도 하고 봉사자 같기도 한 두 연인은 미술관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관리하면서도 틈틈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그림이 두 연인의 뒤를 쫓아가는 형국 같다.
“시를 쓰기 위해서 여행을 자주 합니다. 시가 찾아올 상황을 만나기 위해서 혼자 많이 다니는 편인데요. 시한테 구걸하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차도 타고, 그림도 보러 다니죠.”
그러니까 지난해 봄, 시를 만나기 위해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새벽시장에 들렀다가 오후에는 제법 큰 현대 갤러리를 찾았다.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그는 말라 있었고, 뭐든지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이때 사랑하는 두 연인이 만들어낸 명장면이 그에게 스며들어왔고, 마침내 한 편의 시가 태어났다.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어떤 그림’ 전문)
시인 이병률이 미술관에서 스스로 명장면이 된 두 연인의 사랑을 포착해 노래한 시 ‘어떤 그림’을 비롯해 최근 발표하거나 창작한 시 69편을 묶은 일곱 번째 신작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문학과지성사)을 들고 돌아왔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후 4년 만이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601번째 시집.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시인은 자신이 목도하고 상상한 사랑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선다. 그리하여 푸른 외로움을 딛고 정확하진 않지만 다채로운 사랑의 순간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밝고 환한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다.
‘길 위의 시인’ 이병률이 아릿한 문장과 지워지지 않는 허기로 채운, 막 당도한 사랑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이 시인을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어떤 그림’ 속 두 연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상상력이란 시인의 어떤 재산이고 재능일 텐데. 글쎄, 제가 그 장면에서 어떤 비극적 요소를 읽었다면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고 비관적이고 쓸쓸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으로 봐) 아마 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표제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사랑의 입구에 막 도착해, 더듬고 느끼고 돌입하는 순간을 노래한 작품이다. 사랑이란 결코 완성의 영역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전문)
―이 시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지난해 1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가면서 기차 밖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라는 한 문장이 문뜩 떠올랐다. 이 문장을 시집의 제목으로 하면 어떨까, 이 제목의 시를 쓴다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옛날 한때 화려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곧이어 사랑이 충만했던 그 사람도 떠올랐다. 기차에서 울어본 적, 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계속해 무슨 때, 무슨 때가 켜켜이 쌓여갔다.”
세태를 꼬집는 듯한 시편도 있다. 시 ‘줄’은 사랑의 시로도 읽힐 수 있지만,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파당을 만들고 줄을 서는 세태를 노래하는 우화 같은 작품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사람들이 줄 서 있길래 서 있었다/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괜찮았다// 사람들이 몰려가길래 나도 따라갔다/ 뭐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따라가 보는 거였다// 번번이 걸작 앞이 아니었고/ 거대한 계획을 앞세워서도 아니라는데/ 끼어들어서라도 줄을 섰다// 어떤 줄은 점점 다른 줄로 완성되어갔다// 그럴 수는 없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서면 돌아올 수 없는 줄이 되었다/ 결국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혼자 서 있었다”(‘줄’ 전문)
―무엇을 노래한 것일까.
“현대사회는 비굴해지는 사람이 잘살 수밖에 없도록 디자인이 돼 있고 끼워 맞춰서라도 살아가야 되는 무엇이 있지만, 그럼에도 줄을 서봤자 구리고 비굴해지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라도 혼자 조용히 시를 쓰면서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시를 경배하면서 살 수 있을까. 절대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같은 것이 있다. 옛날 선비 같은 독야청청, 단독자에 대한 약속처럼 도장을 찍듯 썼다. 변치 말자고.”
1967년 제천에서 태어난 이병률은 1995년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을 발표했고,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혼자가 혼자에게’ 등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 문학동네 계열사의 달 출판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잘 나가는 여행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데. 작가로서의 비전은.
“저는 시를 촉발시키는 어떤 순간을 만나기 위해 계속 떠나왔기 때문에 여행적인 에피소드나 사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울러 책을 만드는 사람을 동경했고, 에디터의 책상이 늘 궁금했다. 17, 8년 전 문학동네에 입사해 책 만드는 공부와 홍보하는 일을 했고, 기회가 닿아서 출판사를 운영하게 됐다. 저는 혼자인 저를 늘 지켜보려 한다. 누가 무엇을 하자고 할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귀결은 나는 혼자일 수 있을까, 그 안에서 철저히 혼자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철저히 혼자일 수 있다면, 호기심을 다 쏟아서 그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혼자인 저를 계속 마주 보고 싶다. 이건 시를 계속 쓰겠다는 선언이다.(웃음)”
약속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나타난 시인은 약간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상고머리에 반소매 라운드 티, 자신감 넘치고 경쾌한 모습에선 생활과 몸에 깃든 어떤 자유로운 영혼이 엿보였다. 그의 이야기는 친절하고, 흥미진진했으며, 자주 직유를 넘어서 은유로 내달리곤 했다. 은유의 대지에 닿기 위해 기자는 숨을 고르고 자주 사고의 걷기를 해야 했다.
아마 기자가 은유의 대지에 온전히 닿을 때쯤이면, 시인 이병률은 또다시 어딘가를 걷고 또 걷고 있을 것이다. 푸른 존재와 시를 만나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여로에 서 있을 것이고, 걷는 동안 시인으로 온전히 살아갈 것이다. 혼자 덜컹거리는 밤 기차를 타고 완도 옆 보길도에서 40여년 전 처음 만났던 그날 아침의 마음으로. 바다와, 섬과, 숲과, 생명과, 사람들과, 그리고 시의 마음으로. 이 글을 읽으며 저기 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당신도 혹시 어떤 여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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