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질 받았다" 망상에 결국 무고한 승객에 칼부림
2018년 7월 1일 남해안 고속도로 위를 지나던 고속버스에서 칼부림 사건이 벌어졌다. 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던, 어떤 갈등도 없던 40대 남성 승객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평소 앓던 조울증이 문제였을까. 식욕 억제제도 복용하고 있던 여성은 범행 전 흉기 세 자루를 구입하면서도 부친에겐 "날 데리러 와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여성의 범행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남해고속도로 위 피범벅 된 40대 남성 "살려주세요"
부슬비가 내리던 이날 오전 11시 50분쯤, 경남 하동군 진교면 인근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던 유순주 씨는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의 손짓에 갓길에 차를 멈춰 세웠다. 그때 다급히 유 씨의 차량 창문을 두드린 건 피투성이의 남성 A 씨(당시 44)였다.
A 씨는 정신이 혼미해지던 중에도 "아들이 하나 있다. 병원으로 빨리 가자. 난 살아야 한다"고 유 씨를 재촉했다. 유 씨는 A 씨를 태워 인근 휴게소에 도착했고, 때마침 출동한 119 구급대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119 대원은 "입술 옆으로 해서 귀밑까지 길고 깊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목덜미에는 깊진 않은데 칼에 찔린 상흔이 있었고, 왼쪽 손바닥에서부터 손등까지 길게 찢어진 좌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사고가 일어난 곳은 통영에서 승객 15명을 태우고 광주광역시로 향하던 고속버스 안이었다.
해당 버스에 탔다고 밝힌 이상호 씨는 주변이 시끄러워 잠에서 깼다며 "A 씨 얼굴 쪽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살려달라고, 죽을 것 같다고 소리치고 계셨다"고 떠올렸다.
A 씨는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선 박 모 씨(당시 22·여)가 A 씨를 찌르고 있었다. 이때 이 씨가 주변 승객들과 합심해 박 씨의 손목을 잡고 흉기를 휘두르는 걸 제압했다.
박 씨에게서 흉기를 빼앗았을 땐 이미 버스 안이 A 씨의 피로 흥건했다. 이후 출동한 고속도로 순찰대가 박 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A 씨는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겨우 큰 고비를 넘겼고, 얼굴 부위는 40~50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A 씨는 "눈 감고 쉬는데 뭐가 뒤에서 예리한 깊은 바늘로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며 목에 걸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이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아찔한 상황에 처했다. A 씨는 정신적 충격으로 힘들어하고 있다고.
◇눈에 살기 품고 흉기 구매한 박 씨 "사람을 찔러야겠다"
경남 하동경찰서는 사건 다음 날 박 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후 관할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됐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하동경찰서 이덕현 경찰은 "형사 생활 20년 했는데 수사하면서 황당하더라. 박씨와 A 씨가 다투거나 감정도 없었고 원한도 없었다. 전혀 관련 없는 사이"라고 밝혔다.
박 씨는 범행 이틀 전 집에 있던 흉기 한 자루를 들고 나온 뒤 광주에 있는 백화점에서 14만 5000원짜리의 고급 흉기 두 자루 세트를 구매했다.
박 씨는 총 세 자루의 흉기를 가방에 담고 통영으로 향했다. 이후 한 식당에 방문했고, 식당 직원들은 박 씨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박씨가 혼자 와서 칼국수 한 그릇과 소주 두 병을 마셨다며 "뭐 드실 거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하도 안 해서 두 번을 물어봤다. 그래도 아무 말 안 하고 한참을 앉아 있더라. 예사 눈매가 아니었다. 독기가 있어서 옆에 가기 좀 무섭더라. 취하지도 않았고 잘 걸어갔다"고 진술했다.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집을 나설 때 '사람을 찔러야겠다'는 심정으로 흉기를 챙겼다"며 "(A 씨가 나와 제일 가까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또 흉기를 추가 구입한 것에 대해서는 "1개로는 불안해서 더 샀다"고 진술했다. 다만 왜 사람을 해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살 빼는 약 먹은 뒤로 이상해졌다…조울증도 앓아"
박 씨의 아버지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박 씨는 학창 시절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졸업 후엔 아르바이트도 하며 취업을 준비했다. 범행 한 달 전에는 간호조무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2년 전엔 가족들 앞에서도 흉기를 든 적이 있었다고. 부친은 "흉기로 가족을 해치려는 건 아니었다. 제가 뺏었다. (딸의) 정신이 혼미해서 방언같이 이상한 말만 했다. 그래서 놀라서 병원을 찾아갔다"고 밝혔다.
이어 "살 빼는 약을 먹은 뒤로 이상해졌다. 많이 복용한 뒤 사람이 이상해지고 밥도 안 먹고 기분이 다운되고 더 폭력적으로 그랬다. 의사한테 그런 처방전 해주지 말라고 부탁도 했다"고 털어놨다.
박 씨는 다이어트약을 정량보다 4배 넘게 복용하면서 15~20㎏을 감량했다. 이때 박 씨는 이미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부친은 "6개월 전부터 조울증 증세가 좋아졌다. 그래서 치료를 중단했는데 (범행) 2~3일 전부터 말도 안 하고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아서 증세가 도진다고 생각했다"며 "근데 마침 주말이라 다음 주 월요일에나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다. 근데 딸이 친구 만나러 통영에 간다고 하더라"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박 씨는 흉기를 구입했고, 정작 친구는 만나지 않고 이틀 내내 여관방에 틀어박혀 배달 음식만 주문해 먹었다.
박 씨는 방에서 '자살 사이트' '자살' 등을 검색했다. 염건령 한국범죄학연구소 소장은 "정상적인 사고 패턴과 비정상적인 사고 패턴이 왔다 갔다 하는 이중인격적 상태로 보인다"며 "악한 자아가 칼을 들고 와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도록 유도하는데 선한 자아가 계속 말린 거다. 두 인격이 싸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자꾸 누구한테 해코지하려는 이 나쁜 자아를 제압하기 위해 여관방에 자기 자신을 묶어놓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父 "'데리러 와달라'는 딸 제안 거절, 뼈저리게 후회한다"
박 씨는 범행 전날 저녁, 부친에게 전화해 "나를 데리러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하지만 부친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친구랑 있으니 자고 내일 오라"고 거절했다.
이후 박 씨는 버스에 올라타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이에 부친은 딸의 부탁을 거절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고.
한 정신과 의사는 "당시 조울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울증 환자 일부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아마 흉기를 갖고 있었던 건 본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범행에 영향을 준 건 조울증 자체보다는 술이 더 큰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며 "술 마신 상태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상대방이 자기를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술이 깬 이후에는 실제 본인도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박 씨는 2019년 1월 살인 미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 씨는 A 씨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저리 가"라고 말했다는 망상에 빠져 A 씨를 살해하자고 마음먹고 공격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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