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여름 6·25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에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가 탄생했다. ‘매기’(Maggie)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주인공이다. 그해 6월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히긴스는 일본 도쿄에 있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란 신문의 특파원 신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군 지휘부의 반대에 부딪혀 전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소속 신문사의 상사로부터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말까지 들었다. 히긴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유엔군사령부 초대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하소연했다. 사정을 들은 맥아더는 앞서 미군이 히긴스에게 내린 한국 입국 금지령을 1950년 7월23일 전격 해제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73년 전이다.
곧장 전쟁터로 복귀한 히긴스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다니며 전쟁의 참상과 그 와중에 한국인들이 겪는 고난을 상세히 보도했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히긴스는 미 해병대 장병들과 함께 현장을 지켰다. 반격에 나선 북한군이 쏜 총탄과 포탄이 공중을 가르고 지축을 뒤흔드는 가운데 잔뜩 긴장한 해병대원들의 방어와 돌격을 생생히 기록했다. 이 기사는 상륙작전 사흘 뒤인 그해 9월18일 뉴욕 헤럴드 트리뷴 지면에 실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졌다. 이듬해인 1951년 미국 언론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퓰리처상이 히긴스에게 주어졌다. 국제 보도 부문에서 여성 기자가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히긴스가 사상 처음이다.
히긴스는 한국 해병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국군이 아직 낙동강 방어선 안에 묶여 있던 1950년 8월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경남 통영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통영이면 임시 수도 부산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곳 아닌가. 이에 우리 해병대가 통영에 상륙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이 패주하며 통영은 아군 수중에 들어왔다. 이 소식을 기사로 보도하며 히긴스는 한국 해병대를 가리켜 “그들은 귀신마저 잡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고 썼다. 이 문장에서 파생한 ‘귀신 잡는 해병’이란 표현이 지금도 해병대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정예 부대로서 해병대가 누리는 명성 일부는 히긴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히긴스는 종군기자로서 취재 활동을 이어갔다.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베트남 공산주의 세력이 프랑스군에 맞서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베트남에서 풍토병에 걸린 히긴스는 끝내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46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 국방부는 히긴스가 6·25전쟁 당시 미군의 활약상을 널리 알리고 또 전후 한·미 동맹 성사에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 알링턴 국립묘지 안장을 허가했다. 미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군인들이 묻힌 성스러운 공간이 언론인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 하겠다. 한국 국가보훈부는 2016년 5월 고인을 ‘이달(5월)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비록 총을 들고 전투에 임한 것은 아니지만 ‘영응’이란 호칭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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