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때 日구메지마 섬 학살 다뤄
조선인 등 주민 20명 스파이 몰려 희생
위안부 이야기 이어 아픈 역사 정면 응시
“내 소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쓰고 싶은 것 남 눈치 안보고 쓸 수 있어
한없이 가볍게 둘 때 한없는 자유 주어져”
하늘로 향하는 콘크리트 계단이 인상적인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을 찾았다. 마침 미술관에선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전투 상황을 그린 ‘오키나와 전도’ 시리즈를 전시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 자결과 군대에 의한 집단 처형 상황이 담긴 그림들은, 그를 오키나와 전투 속으로 잡아끌었다.
2023년 3월, 소설가 김숨은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인 군부들이 생활했던 곳을 답사하기 위해서 가이드 김지혜씨와 대학 재학 중인 통역 전효리씨와 함께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했다.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인 군부를 복원하고 싶었고, 특히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서 더듬고 싶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먼 곳에서 생활한 것인지, 그곳까지 가는 동안 어떤 심정이었을지. 할머니의 마음을 스케치하듯 그리고 싶었다.
어둡고 칙칙한 숲 속에서 일본군이 줄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고, 그 줄의 끝에는 한 남성과 그를 껴안은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시리즈 그림의 하나인 ‘구메지마 학살2’와 마주했다. 그림에는 구메지마에서 재일조선인 구중회씨 가족이 학살된 상황이 그려져 있었다. 질문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이틀 전 구메지마에 다녀온 학예사 우에마 가나에씨가 있었다. 김 작가 일행은 배경이 된 사건과 구메지마라는 낯선 섬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들은 두 시간 넘도록 작품 앞에 서서 질문과 답을 이어갔다. 마치 “벌을 받듯”. 그 순간, 소설이 시작됐다.
소설가 김숨이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제도의 작은 섬 구메지마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스파이 혐의로 조선인을 포함해 주민 20명을 학살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모요사출판사)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12번째 장편소설.
김 작가는 이번 작품 집필을 위해서 많은 자료를 탐독했고, 구메지마를 비롯해 오키나와를 두 차례 답사했으며, 현지 주민과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광기 어린 폭력이 생명과 인권을 참혹하게 유린한 태평양전쟁기의 구메지마로 독자들을 이끈다.
소설은 구메지마에 주둔 중인 일본군 수비대 총대장 기무라의 명령으로 군인들과 ‘인간 사냥꾼’이라 불리는 10대 섬 소년들이 9명의 주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학살된 주민들은 미군에 잡혔다가 풀려난 것을 일본군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이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무라 총대장으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
기무라를 정점으로 일본군은 “스파이로 우글우글하다”며 주민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했고, 섬사람들은 누가 스파이인지, 다음 대상은 자신이 아닐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짓눌린다. 항복을 권고하는 미군의 서신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받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은 차례로 학살된다. 광기는 희생양을 찾기 시작하고 마침내 조선인 고물상으로 향해 가는데.
모두 12개 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제1부 ‘9명’, 4부 ‘1명’, 9부 ‘3명’, 12부 ‘7명’ 등 네 개 부에만 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스파이 혐의로 참살당한 주민들의 수다. 네 개 부에 주민 참살이 담겨 있고, 그 사이에 ‘우치마네가 몰살당한 날의 아침, 이틀 전, 한 달 전, 열 달 전’ 식으로 그들의 사연과, 사건의 의미와 실체가 펼쳐진다.
동아시아로 상상력을 급격히 확장해온 김숨 작가가 바라본 태평양전쟁기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왜 이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 2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제도의 작은 섬 구메지마가 배경이다.
“오키나와라는 곳은 피해자란 누구인가, 가해자란 누구인가에 질문을 던지는 공간 같다.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역사나 문학, 활동을 통해 진짜 가해자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면서 분열의 시간을 겪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구메지마 주민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였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었고, 어느 날 갑자기 군대가 섬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들 피해자 안에서 또 가해자들이 생겨났다. 피해자 가운데 가장 아래에 조선인이 있었다. 20명의 피해자 가운데 조선인은 일말의 혐의조차 없었다.”
―기무라 대장으로 상징되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그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기무라 대장은 그리기 어려웠던 인물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의 생전 인터뷰 기사를 봤다. 태도, 자세가 일관된 것에 놀랐다. 그는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했고, 본인이 누구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운 게 아니라 주민들이 찾아와서 누가 미군 스파이 짓을 하는지 총대장인 자신에게 보고했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자기 부정이나 분열이 없는 일관된 확신에 놀랐다. 지금까지 피해자와 관련된 소설을 쓰면서 접한 인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인물이었다.”
―독자들과 무엇을 공유하고 싶었는지.
“작품을 쓰는 동안 나는 왜 쓰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누구에 대해 쓰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 계속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할 때는 주로 피해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왔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오키나와를 공부하면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가해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동시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피해를 경험한 대개의 사람들은, 집단일 경우 특히나, 자신 안에 피해자 DNA만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 것 같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누구나 어느 순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소설은 바로 이 문제를 묻고 있다.”
1974년 울산에서 나고 대전에서 자란 김숨은 1997년 단편소설 ‘느림에 대하여’가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1998년 단편소설 ‘중세의 시간’이 문학동네 신인상에 각각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철’, ‘바느질하는 여자’, ‘떠도는 땅’, ‘듣기 시간’, ‘제비심장’, ‘잃어버린 사람’ 등을, 소설집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침대’,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등을 발표했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로서의 꿈이나 작품으로 비전은.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제가 쓰는 소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끝까지 잊지 말자. (왜 그런가) 그래야 쓰고 싶은 것을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쓸 수 있다. 제가 쓰고 있는 소설을 깃털이나 지푸라기처럼 한없이 가벼운 무엇인가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한없는 쓰기의 자유가 주어진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작가의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 없어야 한다.”
아침 9시쯤 일어나서 커피와 식사를 한 뒤, 집중력이 좋은 오전에는 쓰고 있는 소설에 몰입한다. 오후에는 자료를 찾아 읽고, 밤에는 가능하면 조용히 머리를 비운다. 수사들이 쓴 책을 읽으며 영감을 받기도 하고. 밤 12시가 되면 다시 또 내일을 위해 눈을 감는다. 소설가 김숨의 24시간은 글쓰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마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 듯.
가끔 답사를 가기도 할 것이고, 현재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소외되고 뿌리 뽑힌 이들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온 우주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할 때, 그는 분주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이야기들은 가끔 반달 모양의 도끼가 돼 그의 집필 의지를 내리치려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이야기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쓰고 또 쓸 것이다. 용감하게. 용기 있게. 지치지 않고. 피 칠갑과, 광기와, 인권 유린이 난무하는 야만의 전쟁 한복판일지라도.
“적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엄마가 우는 젖먹이 자식의 입과 코를 제 손으로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거… 그게 전쟁이야. 나머지 가족들이 살기 위해서 말이야. 다시 총을 들 수 없을 만큼 부상이 심한 병사들은 청산가리를 먹여 죽이는 게 전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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