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 후 만주서 항일 운동
조직 들통나자 광복군 3지대 입대
美와 일본군 교란 특수 훈련 수행
일제 항복 선언한 후 상해서 활동
해방 후 극심한 좌우 대립에 일본행
일본서 가명 쓰며 평생 은둔 생활
배우자 눈 감은 후 2023년에야 귀국
생존 애국지사 이하전 지사 등 6명
“일본에 있는 것보다 한국에 돌아오니 좋죠.”
지난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오성규(101) 애국지사가 지난 9일 수원보훈원을 방문한 기자에게 유일하게 남긴 말이다. 국내 최고령 애국지사인 오 지사는 제79주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는 대신 보훈원에서 고국에서 두 번 광복절을 맞이한다. 최근 건강 상태가 나빠져 거동이 불편하고 귀가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이 어렵다. 대화하려면 귀에 바짝 대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다.
오 지사는 평생 일본에서 살아와 한국에는 가족도 지인도 없다. 일본에 자녀가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말이 서툴러 오 지사와 전화로 소통하기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2018년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생활을 이어오다가 여생은 고국에서 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오 지사가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해방정국에서의 극심했던 좌우 이념대립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인물이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만주로 건너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비밀조직망을 형성했다. 이후 만주를 점령한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일본군 점령 지역을 벗어나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김학규 지대장이 이끄는 광복군 3지대는 미국 전략사무국(OSS·중앙정보국 전신)과 국내에 진공해 일본군을 교란하는 특수작전을 준비하며 훈련을 받았다. 오 지사도 OSS에 선발돼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5월부터 3개월간 미군의 클레레스 윔스 대위의 지도하에 독도법, 무전법, 사격, 폭파, 교량건설, 절벽 오르기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우리 광복군의 목표는 OSS 교육 훈련이 끝나는 즉시 연합군과 공동 작전으로 잠수함 또는 비행기의 공수 낙하 방법으로 국내에 진입해 전술 및 전략 폭격 목표를 미군 공작 기지에 타전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초까지만 해도 5개의 공작조를 편성해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8월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며 훈련생들은 국내에 진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해방정국은 좌우 이념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평생 독립운동을 해오던 그도 고국으로 돌아오자 이념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로 인해 오 지사는 국내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기듯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자신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알려질까 봐 오랜 시간 가명을 쓰며 살아왔다. 그가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말한 이유다.
지난해 광복절을 앞두고 귀국해 당시 김학규 지대장의 묘소를 찾아 신고할 정도로 정정했던 오 지사는 최근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상태로 두 번째 광복절을 맞는다. 79년이 흐른 광복절도 이념논쟁으로 인해 둘로 쪼개진 상황이지만 그는 “그래도 한국에 오니 좋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현재 생존한 독립유공자(애국지사)는 오 지사를 포함해 6명뿐이다. 올해 100세인 김영관 지사는 1944년 일본군을 탈출한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중국군과 합동으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유일한 국외 거주 생존 지사인 이하전(103) 지사는 1941년 일본 유학 중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 운동을 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인물로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강태선(100) 지사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복역 중 광복으로 출옥했다. 이석규(98) 지사는 1943년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학우들과 무등독서회를 조직해 연합군 상륙에 맞춰 봉기를 계획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오성규, 오희옥 지사는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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