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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작전 ‘드라군’ 80주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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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15 08:04:58 수정 : 2024-08-15 08: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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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첫 번째만 기억하고 두 번째부터는 그냥 잊어버리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투도 그렇다. 1944년 6월6일 미국·영국·캐나다가 단행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일명 ‘디데이’(D-Day)로 불리며 2차대전 승리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자리매김 했다. ‘지상 최대의 작전’부터 ‘라이언 일병 구하기’까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가 됐다. 그런데 디데이로부터 2개월여 지난 1944년 8월15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이뤄진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후에도 프랑스 국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내몰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프로방스에 상륙한 연합군에 맡겨진 임무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저 ‘노르망디 상륙으로 프랑스가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짧은 한 문장만 입력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 8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단행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명 ‘드라군’) 모습. 올해는 프로방스 상륙작전 80주년이 되는 해다. AFP연합뉴스

이렇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어려운 여건 하에서 단행됐다. 독일군은 상륙 지점을 정확히 예측하진 못했으나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란 점은 직감하고 노르망디 바닷가 주변에 강력한 방어군을 배치해 놓았다. 디데이 당일 미군은 ‘오마하’와 ‘유타’, 영국군은 ‘골드’와 ‘소드’, 캐나다군은 ‘주노’ 해변에 각각 상륙해 교두보 점령에 나섰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 오마하 해변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다. 상륙 첫날에만 연합군 장병 4400여명이 독일군과의 교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면 프로방스 상륙작전은 독일군의 저항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 프랑스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이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대거 북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프로방스 상륙 첫날 전사한 연합군 장병은 1000여명으로 노르망디와 비교가 안 된다. 할리우드의 시선으로 보면 ‘영화화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작전인 셈이다.

 

두 번째로 프로방스 상륙을 놓고 연합국 지도자들 간에 불거진 분열을 꼽을 수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프랑스 남부 상륙을 강력히 지지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아군을 지원하면서 신속히 독일 본토로 진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여겼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도 루스벨트와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전후 소련이 동유럽을 자기네 세력권으로 만들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를 막으려면 영·미 연합군을 동쪽으로 최대한 깊숙이 진출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지중해를 건넌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 말고 그 동쪽의 이탈리아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처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프로방스 상륙작전의 의미가 평가절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미국과 소련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4년 8월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를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한 프랑스군 병사들이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프로방스 상륙작전에 참여한 프랑스군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충원된 흑인 병사들이 많았다. AFP연합뉴스

연합군이 프로방스 상륙에 붙인 작전명은 ‘드라군’(Dragoon)이었다. 프랑스는 노르망디 상륙에선 철저히 소외된 반면 드라군 작전에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은 물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카메룬, 토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니제르, 말리, 알제리, 부르키나파소 등에서 충원된 군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프로방스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프랑스 국토의 약 30%를 독일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며 “2차대전 초반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가 전후 미국·영국·소련과 더불어 전승국에 포함되고 독일 분할 점령에도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드라군 작전 이후 프랑스군의 활약상이 결정적 영향을 했다”고 평가한다. 드라군 작전 80주년을 맞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당시 함께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상을 초청하는 등 프로방스 상륙 재평가에 앞장서는 모습이다. 드라군 작전이 ‘잊힌 전투’라는 오명을 벗을지 주목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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