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4년 8월19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이 국민장(國民葬)으로 엄수됐다. 이튿날인 8월20일에는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 전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전체가 일제히 사표를 냈다. 육 여사는 그해 8월15일 제29주년 광복절 경축식장에 난입한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숨졌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남의 명의로 여권을 발급받았으며 몰래 훔친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채 한국에 입국했다. 고위 공무원들의 일괄 사표 제출은 이를 막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이었다. 주요국 대사 가운데 당시 김영선 주일 한국 대사도 사의를 밝혔다. 솔직히 주일 대사가 재일교포 한 사람 한 사람의 동향까지 어떻게 파악하겠나. 김 대사의 사표는 반려됐다. 그에겐 아주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중한 사과를 요구했다. 문세광에 대한 우리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그가 친북 성향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일명 ‘조총련’(朝總聯)에 포섭된 정황이 드러났다. 이 점을 들어 한국은 “조총련의 반(反)한국 활동을 엄중히 단속하라”고 일본에 촉구했다. 외무부(현 외교부)에서 하달한 이 같은 지침에 따라 김 대사가 도쿄 정부를 상대로 교섭에 나섰지만 일본의 태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44세인 노신영 외무부 차관이 56세인 김 대사를 국제 전화로 불러내 “대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일본과의 단교(斷交)까지 감안한 한국 정부의 전방위 공세에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전 외무상을 통해 청와대로 사과의 서한을 보냈다. 조총련 관련 내용은 편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시이나 전 외상이 박 대통령 앞에서 구두로 “조총련의 반한 활동을 단속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한·일 갈등은 막을 내렸다.
최근 ‘두 쪽 난’ 광복절 경축식의 발단이 된 독립기념관의 건립은 1982년 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왜곡 사건이 시발점이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진출’, 1919년 3·1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한 일본 역사 교과서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며 반일감정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당시만 해도 생존해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광복군에서 활약한 안춘생 장군은 언론 인터뷰에서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이 나라에 독립기념관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한탄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 자발적인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이듬해인 1983년 10월 성금 총액이 400억원을 넘어섰으니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 시절 우리 주일 대사는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최경록 장군이었다. 연배로나 군 기수로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보다 훨씬 위였으니 외무부도 그를 함부로 대하진 못한 듯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마음을 일본 측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최 대사 또한 극심한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박철희 전 국립외교원장이 새 주일 대사로 임명돼 지난 9일 일본에 부임했다. 일본 정치를 전공한 연구자로 일본 학계는 물론 정계에도 탄탄한 인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조야에서도 그의 주일 대사 발탁을 환영했다는 후문이다. 박 대사는 윤석열정부 들어 국립외교원장이 된 뒤로 최근까지도 한·일 관계 개선과 그에 기반한 한·미·일 3국 안보 협력 강화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독립기념관장 인사를 계기로 국내에서 다시 불붙은 친일·반일 논란이 그의 활동 반경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마침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방송에서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김 차장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으나 우리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울 길 없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시급하지만 박 대사가 ‘중요한 건 한국 국민의 마음’이란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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