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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1만6000명의 헌혈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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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21 23:31:00 수정 : 2024-08-21 23: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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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방문력으로 헌혈을 못 하면, 영국인들은 어떻게 수혈받나요?” 헌혈을 하지 못하게 된 한 국내 헌혈자의 항의 질문이었다. 영국 현지에서도 일부 제한은 있으나 자국민들로부터 헌혈을 받아 혈액제제를 공급한다. 다만, 헌혈자 선별기준의 인간 광우병(vCJD) 위험국 방문력에 대한 기준이 다를 뿐이다. 이렇듯 헌혈자 선별기준은 과학적 근거 이외에도 지역과 시대 등 사회적 여건을 반영한다.

vCJD 발생 보고가 없음에도 안전 수혈을 위해 2002년 국내 헌혈자 문진 기준에 영국 체류 여부가 포함됐다. 이후 몇 차례 개정을 거쳐 vCJD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국가의 일정 기간 체류자는 헌혈에서 영구 배제됐다. 미국산 쇠고기로부터 시작해 과장 혹은 허위 정보로 확대된 국민적 vCJD 공포가 헌혈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비록 수혈과 vCJD의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아도 vCJD에 대한 국민적 공포를 고려하면 당시의 규제는 과도할지언정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임영애 아주의대 진단검사의학교실 교수

이후 2011년 개정된 기준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1980년부터 일정 기간 체류 시 헌혈을 할 수 없도록 현재까지 적용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헌혈하려다 오래전 영국에 1년 연수 간 경력 때문에 배제당한 필자의 지인이나 영국에 장기 체류한 건장한 유명 스포츠 선수들조차 헌혈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다행히 영국과 유럽은 위험도 감소 조치를 통해 2000년 이후 vCJD 환자 발생이 급격히 감소했다. 2011년 헌혈자 문진표 개정 이후 많은 사회적 변화도 있었다.

우선 2022년 미국과 호주를 시작으로 여러 국가가 vCJD와 관련 헌혈 제한 규정을 삭제하거나 일부 기준을 완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혈액수급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안정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축적됐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한국의 초고령화와 초저출산 환경 요인이다. 2022년은 2011년에 비해 10~20대 헌혈자가 4분의 1 이상 감소했고, 전체 적혈구제제의 약 70%를 사용하는 60대 이상의 고령자는 15.8%에서 26.2%로 증가했다. 또한 2023년 해외 출국자는 2011년 대비 약 80% 증가했다. 이는 현재의 제한 규정이 미래의 건장한 해외 장기 체류자들까지 영구 헌혈 금지자로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는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혈장분획제제의 사용으로 최근 원료혈장의 국내 자급률이 50%에도 못 미치는 점이다. 헌혈 혈액은 수혈용뿐 아니라 알부민, 면역글로불린 등의 혈장분획제제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2023년 말 면역글로불린 품귀현상 탓에 애태우던 환자들의 고통이 미국산 쇠고기로부터 비롯된 막연한 공포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과학적 근거하에 vCJD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부터 탈피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정부도 지역 및 기간별 위험도 차이를 고려해 기준 완화를 검토 중이라 한다. 완화된 기준이 적용된다면 매년 헌혈금지 신규 등록 대상인 약 1000명과 헌혈 영구금지 대상자 1만6000여명의 헌혈이 가능해진다. 조만간 이들이 헌혈할 권리를 되찾고 국내 혈액수급에도 보다 숨통이 트이길 기대한다.

 

임영애 아주의대 진단검사의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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