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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슈리성, 조선 창덕궁과 닮았다” [일본 속 우리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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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24 18:00:00 수정 : 2024-08-26 13: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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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왕국, 조선 등 주변국가와 교류로 유지·번성
15세기 조선 증정품 동종 오키나와 첫 국보로
“조선 도공이 연 가마, 오키나와 도기생산 발상지”

지난 17일 일본 오키나와 국제거리, 어딜가나 외국인이다. 한국어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느낌상 가장 많은 건 중국어다.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대만에서 온 사람들일까. 영어를 쓰는 서양인들은 오키나와 주둔 주일미군 소속일 지 모르겠다. 음식점, 술집, 선물가게, 호텔 등이 줄지어 선 오키나와의 유명 관광지인 이 곳은 이름 그대로 국제적이다.

 

일본 오키나와의 주요 관광지인 국제거리. 

길게는 수백 년 전, 오키나와 일대 섬들이 ‘류큐왕국’으로 불리던 그 옛날의 어느 거리 풍경도 비슷했을 것이다. 해양국가 류큐는 중국, 1879년까지 별개의 국가였던 일본, 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 무역을 왕조 유지,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조선은 류큐의 정체성 중 하나인 국제교류의 한 축이었다. 직접 오고 간, 일본이 들여온 조선 문화를 가져다 활용한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전한다.  

1467년 조선에서 류큐로 전해진 동종. 오키나와 전투로 훼손돼 현재는 용두(왼쪽)만 남았고, 전체 모습은 그 전에 찍은 사진(오른쪽)으로 알 수 있다. 오키나와현청 홈페이지

 

◆오키나와의 첫 국보가 된 경상도 동종(銅鐘)

 

태평양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5년 4월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는 엄청난 인명, 재산피해를 낳아 지금도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류큐의 역사를 전하는 수많은 문화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7년 오키나와에선 처음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나미노우에궁 조선종’도 그 중 하나다. 

 

오키나와현립박물관에 용두(종을 걸기 위한 용모양의 고리)만 남아 전하는 조선종은 경남의 한 사찰에 걸려 있었다. 956년에 제작됐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역대보안’(歷代寶案)이란 기록에 “성화3년(1467년) 4월 2일 조선의 증정품으로 불교 경전과 함께 작은 종 1개”라는 전래 경위가 전한다. 높이 약 82㎝, 구경(口徑) 약 57㎝의 그리 크지 않은 덩치에 비천, 보살이 새겨져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소실돼 지금은 용두만 남았고, 전체 모습은 소실 전 찍어둔 사진으로 전한다. 오키나와 박물관은 “류큐와 조선의 교류사, 불교사를 생각할 때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오키나와현 지정유형문화재다. 

오키나와 도기생산의 발상지인 와구타 옛 가마 유적. 오키나와현청 홈페이지

◆조선·류큐의 합작품, 오키나와 도기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조선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제는 상식이 된 사실은 오키나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와구타 옛 가마 1호 가마’는 오키나와 박물관으로 이전돼 2007년부터 야외에 전시 중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류큐는 1616년 가고시마에서 조선인 도공 일육(一六), 일관(一官), 삼관(三官) 세 사람을 데려와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시작됐다. 이제는 오키나와 도기생산의 발상지로 간주된다. 오키나와 박물관은 “발굴 조사 결과 (1616년 이전인) 16세기에 가마가 열린 것으로 보인다”며 “오키나와의 초기 요업 실태나 도자기 생산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유구”라고 소개했다.

 

류큐 왕실의 도자기 문화에도 조선의 덕을 입었다. 오키나와 츄라시마 재단은 “오키나와 도기는 아라야치(荒焼·유약을 바르지않고 그대로 구운 것)와 죠야치(上焼·유약을 발라 장식성을 더한 것)으로 나뉜다”며 “죠야치는 17세기 초 사쓰마에서 조선인 도공을 초대해 시작했고, 이후 중국이나 사쓰마에서 도기법을 배워 발전시켜 갔다”고 설명했다.

 

우라소에성(城)에서는 고려계 기와가 대량으로 발굴됐다. 1988년 국가 지정 사적이 된 이후 정비 작업과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인 이 곳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유물이 고려계 기와다. 날개 문양이나 ‘天’(천), ‘대천’(大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명문도 있다. 제작기법이나 형태는 한반도와 관련이 깊지만 재료인 흙은 오키나와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반도와 오키나와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좋겠다.   

 

2019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 슈리성. 

 

슈리성 복원 작업 현장. 

◆“류큐 슈리성, 창덕궁과 닮았다”

 

슈리성은 무역 중심인 나하항을 내려다보는 해발 120∼130m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왕궁이자 정치, 제례의 거점으로 류큐의 상징이다. 발굴조사 결과 14세기 중엽의 것이 가장 오래된 유구로 파악됐다. 1427년 이전에 왕궁으로서 형태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 때를 포함해 4번 전소피해를 입었고, 매번 복원됐다. 2019년 10월 화재는 5번째 피해였다. 정전 등 중심 건물이 사라졌다. 2년 후 완공을 목표로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슈리성 원형은 아시아 최대의 목조 궁전”이라는 데 조선의 별궁인 창덕궁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오키나와 츄라시마 재단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앞마당은 전후 40m, 좌우 약 65m로 슈리성의 그것과 규모가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이어 “입구인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 가는 돌길 좌우에 각 관직의 품위(品位)에 따라 서는 장소에 표지석을 세웠고, 슈리성에서는 줄무늬의 벽돌이 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오키나와=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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