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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노리개였다”…‘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의 전말 [그해 오늘]

입력 : 2024-08-28 23:00:00 수정 : 2024-08-29 11: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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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
얌전했던 딸, 일하고 오면 “죽여야 해” 말 되풀이
성폭행 및 강제추행 가해자 지목된 남성만 12명

2009년 8월28일 오후 8시 18분 18초. 한 아파트 18층에서 30대 여성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6일 뒤, 그의 동생 B씨도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을 잃은 충격에 뇌출혈로 쓰러진 부친은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모친은 지금까지 외로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집단 성폭행으로 끝내 세상을 등진 A씨가 출연했던 드라마 화면 일부. /사진=JTBC 갈무리

20년 전, 세상을 발칵 뒤집은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원생이던 A(당시 30세)씨는 IQ 157로 평소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국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던 동생 B(당시 26세)씨 소개로 단역배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 조용했던 A씨, 폭력적 성향 보이며 “죽여야 해” 혼잣말 

 

단역배우 일을 시작하고 4개월 뒤, A씨는 다른 사람이 됐다. 평소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던 A씨는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이유 없이 벽을 때리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또 사람들 이름을 언급하며 “죽여야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점점 폭력적 성향으로 변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여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상담 도중 A씨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A씨 고백에 따르면, 그는 보조출연 관리업체 단역배우 반장 등에게 4개월간 성폭력, 성추행을 당했다. A씨가 첫 피해를 본 건 단역배우로 활동한 지 약 한 달 뒤인 8월부터였다고 한다. 반장 C씨가 술을 먹이고 성폭행했다.

 

C씨는 자신의 범죄에서 끝내지 않고 그해 10월부터는 다른 반장들에게도 A씨를 음란한 여성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이후 A씨는 촬영지 모텔 등에서 현장 반장, 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에게까지 성폭행이나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A씨는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수 없었다. 

 

◆ 용기 내 신고했지만…경찰 “성폭행 상황 묘사해 보라” 2차 가해 

 

뒤늦게 이런 사실을 듣게 된 A씨 모친은 그를 설득해 2004년 12월 ‘성폭행’과 ‘강제추행’ 등 혐의로 기획사 관계자 12명을 경찰에 고소했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기획사 반장 C씨 등 4명이 돌아가며 성폭행하고, 나머지 8명은 강제추행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고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남성들은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고, 그 과정에서 A씨는 심적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2차 피해도 이어졌다. A씨 모친에 따르면 당시 경찰 조사에서 한 수사관은 A씨에게 남성의 주요부위를 그려오라거나 성폭행 당시 상황을 묘사해 보라며 A씨를 보고 수사관들끼리 웃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경찰은 조사에서 “피의자가 양쪽 가슴을 움켜잡았다면 소리라도 질러야 되고 상대에게 반항이라도 해야 되지 않냐” 등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경찰 조사 방식과 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A씨와 가족은 2년 만인 2006년에 고소를 취하했다. A씨가 적은 고소 취하 이유는 “힘들어서요”였다.

 

◆ 피해자가 남긴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18층의 의미 

 

A씨는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한 아파트 18층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짧은 유서 형식의 메모에는 “난 그들의 노리개였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A씨는 이날 낮에 자신이 뛰어내릴 장소를 사전 답사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18일, 18분이라는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JTBC 갈무리

언니에게 단역배우 일자리를 소개한 동생 B씨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엿새 뒤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유서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두 딸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받은 부친은 두 달 만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모친은 2014년 남성 12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지만, 민법상 소멸시효인 3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성폭행 발생으로부터 9년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이후 모친이 할 수 있는 것은 1인시위 뿐이었다. 모친은 해당 기획사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갔고,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A씨 모친을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고소했다. 검찰은 모친을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법원은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A씨 모녀의 고통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A씨 사건은 잊혀져갔다. 그러다 미투(성폭력 고발 운동·METOO) 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3월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당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여론도 다시 불붙었고,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 사건을 재수사해 달라”는 청원 글이 쇄도했다. 청원자는 “여전히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과 부실 수사를 한 사람은 잘 산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 

 

현재 모친은 자신의 이름을 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사건을 폭로하는 등 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많은 분이 억울하게 죽은 우리 딸들의 사건을 알아주시고 함께 울어주셔서 감사하다. 딸들의 명예가 회복돼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며 “악마들의 만행을 공유해달라. 우리 딸들의 유언이다”라고 전했다.


박윤희 기자 py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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