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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가축화 시대, 견디고 이겨내려는 욕망… ‘야성’ 깨우고 싶었어요”

입력 : 2024-09-10 20:40:50 수정 : 2024-09-10 2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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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천국’ 펴낸 정유정

현재와 10만년 뒤 ‘롤라의 세계’ 교차하며
운명에 맞서는 인간들의 자유 의지 그려

롤라행 티켓 찾으려는 자·빼앗으려는 자
노숙자 시설 삼애원 둘러싼 복마전 실체
현재와 미래의 관계·사건이 비로소 연결

유발 하라리 ‘의식 데이터화’ 언급서 영감
“영원한 천국 있다면 재미없고 지루할 것”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요.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본문 중에서

 

만약 인간의 의식이나 무의식은 물론 모든 과학 지식을 한꺼번에 슈퍼컴퓨터 같은 곳에 데이터로 업로드한다면, 인간의 몸에 있는 신경 구조라든가 감각 작용까지도 같이 업로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고, 인간의 실제 모습과 똑같은 홀로그램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늘 꿈꿔 온 불멸의 존재가 되는 셈이다.

 

소설가 정유정이 현재와 약 10만년 뒤의 시공간을 교차하면서 운명에 맞선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린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를 들고 돌아왔다. 소설은 출간과 함께 교보문고 주간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은행나무 제공

소설의 영감을 얻을까 해서 책을 든 건 아니었다.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심심하면 인문학 고전이나 대중과학서를 읽던 그는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를 좋아했다. 해박한 과학 지식에 상상력까지 출중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라니. 이번 책에서는 어떤 상상력을 보여줄까.

다른 장편을 쓰고 있던 4년 전쯤, 소설가 정유정은 우연히 유발 하라리의 책 ‘호모 데우스’를 집어 들었다. 책 후반부에 인간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두세 번 거듭해 읽었다. 모든 이들이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과연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욕망이 뭘까.

“남는 욕망이 하나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놀이를 배우고 즐기며 죽을 때까지도 놀이를 하다가 죽는 놀이의 동물, 유희의 동물입니다. 바로 서사 놀이죠. 인간들에게 가상 세계에서 서사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어떤 극장을 만들어주고 긴 세월을 보내게 한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롤라라는 개념이 생겨났죠.”

여러 상상을 하다가 소설이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는 장편 ‘완전한 행복’을 한창 집필 중이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단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메모만 해놓았다. ‘완전한 행복’을 출간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구상하고 취재에 나섰다. 특히 주인공의 내면과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거대한 유빙에 포위된 홋카이도의 아바시리 바다와, 태초에는 바다였지만 황량하고 메마른 모래땅이 된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을 다녀오기도 했다.

 

소설가 정유정이 현재와 약 10만년 뒤의 시공간을 교차하면서 운명에 맞선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그린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을 들고 돌아왔다. 장편 ‘완전한 행복’ 이후 3년 만이다.

소설은 삼애원을 중심으로 한 핍진한 현재와, 발칙한 10만년 뒤 ‘롤라’의 세계라는 시공간을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가상 극장 ‘드림 시어터’의 프로그래밍 기술자인 해상은 의뢰를 받고 롤라의 세계에서 경주를 만난다. 해상은 경주의 드림 시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경주로부터 노숙자 재활시설 삼애원 이야기를 듣는다.

의료 사고로 직장을 잃은 데 이어 동생마저 잃은 도수치료사 경주는 삼애원 보안요원으로 취직한다. 영원한 천국이 완성됐다는 소문과 노숙자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주는 삼애원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을 만나고, 특히 함께 보안요원으로 입사한 제이가 노숙자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비밀리에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경주는 삼애원에서 끝난 35세 이후를 백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만, 해상은 그러면 드림 시어터를 만들 수 없다며 3년 동안의 행적을 거듭 요구한다. 경주는 그렇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버틴다. 롤라행 티켓을 놓고 찾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삼애원 복마전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마침내 미래의 해상과 경주, 현재의 경주와 제이 등의 관계와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하는데.

“‘나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롤라에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도망친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성급하게. 이곳에 와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해할 만한 실마리라도 찾지 않았을까.’ 그 이해가 왜 그리 중요한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해 태어난다. 우연하게 관계를 맺고 우연 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는 삶은 롤라 극장에나 존재할 것이다. ‘내겐 운명의 설계 없이 살아볼 기회가 필요해요. 도망치지 않는다면, 견뎌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세상에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아서.’”

‘아마존 여전사’ 같은 작가 정유정은 왜 10만년 뒤의 미래와 천국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그가 그린 미래와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 작가를 지난달 28일 서울 합정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만났다.

 

―집필을 위해서 홋카이도의 아바시리와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을 다녀왔는데.

“경주의 내면은 홋카이도 유빙지대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유빙지대에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져 홋카이도로 바꿨다. 반면 해상의 정체성은 사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종의 기원’이 번역 출간된 이집트에서 행사 요청이 왔다. 행사를 소화하고 바하리야 사막으로 갔다. 밤안개가 낀 어둠 속에서 여우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제이와 해상은 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을 연인으로 바꾸자 이야기와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

“태초부터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어떤 야성, 그러니까 불행을 견디고 맞서고 그것을 끝내 이겨내려고 하는 욕망, 야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야성은 처음 사바나에서 하찮은 존재였던 호모 사피엔스를 지구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사바나 조상들이 우리한테 물려준 게 바로 야성인데, 현대 문명을 살아가면서 사회적 규범이라든가 문명에 길이 들어서, 이른바 ‘가축화’돼, 무의식 속에 잠들게 됐다. 좌절감이 클 때 무의식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야성의 힘을 깨워서 맞서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가능할까.

“저는 천국이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얼마간 행복할지 모르지만 결국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다음 생에 천국에 가는 것을 꿈꾸는 것보다 이생에서 삶의 가치를 찾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더 중요하다.”

1966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정유정은 2007년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년 뒤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연속으로 거머쥐며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진이, 지니’, ‘완전한 행복’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요즘 “잠이 조금 늘어서” ‘무려’ 새벽 5시쯤 일어난다고, 소설가 정유정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선, 메탈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깨운다. 먼저 진도가 나가는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진도가 나간 원고를 다시 수정한다. 오후 5시가 되면, 방문을 닫고 운동하러 나간다. 한 시간은 유산소 운동, 또 한 시간은 근력 운동. 돌아오면 씻고, 술 한 잔 마시고, 잔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조차도 책상에 앉아 읽고 노트 필기를 한다. 가급적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려고 애쓴다. 소설 흐름이 끊길 수 있기 때문에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마존 여전사 같은 루틴 속에서, 마침내 그는 정신병원 폐쇄병동 탈주를 시도하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 되고, 희대의 살인마 아들이 돼 악몽처럼 세령호 주위를 배회하다가, 마침내 청춘 남녀가 돼 밤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여우를 맞으러 이집트 바하리야 사막으로….

“녀석은 알레가 던져둔 포도를 주워 먹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귀를 바짝 세우고 눈을 까맣게 빛내며 우리를 봤다. 그때, 녀석과 눈을 맞대던 바로 그때 나는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였다. 처음엔 녀석이 내는 소리인가 했다.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아마도 살고 싶어 하는 내 욕망이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는 소리였을 것이다. 너무나 명백해서 어찌해볼 여지가 없는 내 운명에 대한 분노의 소리였을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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