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이미지와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호감도가 높아진 나라 가운데 동남아시아 도시국가 ‘싱가포르’도 있다. 깨끗한 관광자원, 영어 소통, 1인당 국내총생산(GDP) 9만달러의 부국, 그리고 석유를 비롯한 여러 자원의 선물(先物)거래소까지 갖추고 있어 한국인이 자주 방문해야 하는 국가로 급부상했다. 동시에 한류에 흠뻑 빠진 싱가포르인의 한국 방문이 급증하는 등 관광 교류도 활발해졌다.
싱가포르는 ‘지정학적 배꼽(geopolitical navel)’이라 불리는 전략적 위치에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교통로 중 하나인 말라카해협 꼭짓점에서, 인도양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 해상무역의 허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작은 국가임에도 외교무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왔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회담이 대표적이다.
한·싱 관계는 주로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은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제조 분야에서 강점이 있으며, 싱가포르는 금융, 물류, 디지털 혁신에 앞서 서로 보완적 관계가 된다. 두 나라는 2005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무역과 투자 흐름을 크게 활성화했다. 2023년 기준으로 양국 간 교역액은 약 299억달러(약 40조원)에 이른다.
두 나라 모두 첨단기술에 관심이 높다. 인공지능(AI), 스마트시티, 사이버 보안 등은 양국의 시너지가 효과가 큰 분야다. 싱가포르는 ‘스마트 국가’로 전환을 목표로 하며, 도시계획, 교통, 공공서비스에 첨단기술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국과의 기술 협력을 원한다. 한국의 기술과 싱가포르의 혁신 역량이 결합하면 세계 초일류 모델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급변하는 국제 질서는 두 나라를 단순 경제 파트너로 놔두지 않는다. 지정학적 시선에서, 양 국가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특히 남중국해와 한반도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됐다. 어느 한쪽에서의 불안은 곧 전지구적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북한의 위협과 동시에 중국, 일본, 미국과의 복잡한 외교관계를 관리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강화하며 아세안 회원국 특유의 실용주의적 외교전략을 펼치고 있다. 안보 협력의 구체적 방안으로는 합동 군사훈련, 정보공유, 사이버 안보 분야가 있다.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공급망 협력도 주요 안보 이슈다.
싱가포르와의 전방위적인 협력은 아세안(ASEAN)이라는 역내 가장 중요한 중립적 지렛대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주(10월10일) 라오스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아세안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
이에 앞선 10월 8일 윤 대통령과 로런스 웡 총리는 수교 50주년(2025년)을 맞이한 한·싱 관계를 경제 협력을 넘어 안보 이슈를 포괄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다. 양국이 협력하면 미·중 갈등의 여파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 내 평화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 ‘아시아의 배꼽’ 싱가포르가 소중한 이유다.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싱가포르국립대(NUS)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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