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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건축물 속 형형색색 단청
단풍에서 아이디어 얻었을까
기하학적 문양의 서양 건물도
정성 가득 화려하긴 매한가지

올여름 더위는 유난히 늦도록 극성이었다. 늦더위가 얼마나 맹렬했던지 추석이 지나고도 여름이 가래떡 늘어지듯 자꾸만 길어져 올해는 아예 가을이 없을까 봐 마음 졸였다. 그래도 늦더위가 절기는 못 이기는지 시월이 되자 ‘나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제 하늘이 맑고 높은 가을이라 찬바람에 나뭇잎이 울긋불긋 온 산천을 물들이고 있고 그 절정도 멀지 않았다.

1940년대 초, 소설가 정비석은 금강산 장안사를 출발해 명경대, 망군대, 비로봉, 마의태자 묘를 차례로 둘러보고 쓴 수필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 금강산 단풍을 글 읽는 사람의 눈앞에 보이듯 그려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綠)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

… 산은 언제 어디에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

정비석이 묘사하듯 화려한 단풍의 색깔을 보고 있으면 옛사람들이 색칠로 건축물을 장식했을 때 단풍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나 상상하게 된다. 단풍의 색깔이 단청의 색상과 비슷하기도 하고 단청의 문양도 대부분 덩굴 등 식물에서 유래된 것이 많은 것도 그럴 법하다.

궁궐을 비롯한 관아 건축물과 절집 등을 여러 색깔과 문양으로 꾸미는 것이 단청이다. 간단하게는 물감을 풀로 목조 건축물의 표면에 붙이는 것을 단청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단청용 물감은 ‘단청(丹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붉은색의 단(丹)과 푸른색의 청(靑)을 비롯해 녹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을 기본으로 한다. 또, 각 색은 채도와 명도에 따라, 붉은색은 진한 붉은색인 번주홍, 일본풍의 선명한 붉은색인 왜주홍, 중국풍의 붉은색인 당주홍, 오렌지색처럼 화려한 장단 등으로 구분한다. 청색은 진한 청색인 군청과 연한 청색인 삼청 등으로 나눈다. 녹색은 진하기에 따라 차례로 진한 녹색인 뇌록, 나뭇잎 색깔인 하엽, 밝은 녹색인 양록 등으로 구분한다. 이와 더불어, 옛 문헌에서 보이는 명칭을 통해 옛 물감을 이해할 수도 있다. 당채(唐彩), 진채(眞彩), 박채(薄彩), 분채(粉彩), 토채(土彩), 향채(鄕彩) 등이 그것이다. 본래 ‘당(唐)’은 중국을 뜻하고 “창경궁 건축에 필요한 당채색의 조달을 위해 화원을 요동으로 보낸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채는 중국에서 수입한 물감임을 알 수 있다. 진채 또한 중국 등 외국에서 수입한 질 좋은 물감으로 추정된다. 실록을 비롯한 다수의 문헌에서 “진채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값비싼 물감이라 사찰과 민가 등에서는 사용을 금한다”고 했다. 박채는 채도와 명도가 떨어지는 하급 물감을 가리키기도 하고, 물감을 묽게 탄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분채에서 ‘분(粉)’은 조가비 가루를 가리키고 여기에 아연, 구리, 납 등을 넣고 가열하여 여러 색깔로 만든 물감을 말한다. 분채의 제조법은 17세기 중국 기술서 ‘천공개물’에 소개된 것으로 봐서 그 이전부터 사용된 듯하다. 또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저술 총서 ‘청장관전서’에도 이에 대한 제조법이 언급되어 있다. 토채는 색깔 있는 흙으로 만든 국산 물감이고 향채는 수입 물감에 대비되는 국산 물감이다. 물감을 붙이는 풀은 쇠가죽을 고아 만드는 아교가 대표적이지만, 민어 부레에서 얻는 어교, 사슴의 뿔로 만드는 녹각교, 멥쌀과 찹쌀로 만드는 미말과 점미말 등이 두루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1970년 이후 공식적으로 전통 물감과 풀에 의한 단청을 폐기하고 화학 물감인 페인트와 화학 풀을 이용해 단청을 해왔다. 1971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10달러였던 당시 나라 형편에 대부분이 수입품인 전통 물감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2008년 숭례문 화재 후 복구 때는 1인당 국민총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선 넉넉한 형편이라 당시 정부는 다시금 전통 물감과 풀로 단청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거의 반세기 가까이 내팽개쳤던 옛 기법을 하루아침에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건축물의 외장을 색깔로 꾸미는 기법은 나무로 집을 짓는 동양은 물론 돌로 집을 짓는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 신전이 지금은 하얀 돌집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우리의 단청처럼 갖은 색조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유럽 제국의 성당이나 이슬람 제국의 모스크에는 여러 색깔과 무늬로 꾸민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다. 또, 술탄을 위한 알함브라 궁전의 기하학적 문양과 색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속 권력에 대한 권위가 되었건, 절대자를 향한 경배가 되었건, 그들을 위한 건축물은 하나같이 울긋불긋 나름의 정성으로 꾸미고자 했던 것은 인간 사회 어느 곳이든 매한가지였다.

단청이 단풍에서 온 듯하다는 상상을 하는 사이 가을 단풍은 절정을 향해 내닫는다. 온 천지가 단풍으로 물들어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을’ 날도 멀지 않았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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