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尼 홍수·美 폭풍… 투표소 운영 차질
인도에선 폭염 탓 유권자 등 사망 속출
美대선 유세 땐 열사병으로 다수 입원
알제리 역대급 더위에 대선 투표율 뚝
이례적 선거일 변경 조치에도 역부족
기후변화 일상 위협… 시민 관심 커져
영국선 ‘COP27’ 불참 선언에 논란 일어
선거 땐 경제 문제에 우선순위 밀리기도
美, ‘기후변화 사기극’ 외친 트럼프 당선
유럽의회·독일 녹색당 성적도 기대 이하
허리케인 헐린이 미국 플로리다 북부에 상륙한 지난 9월26일은 지역 선거 관리 당국이 유권자에게 우편투표를 위한 투표용지를 발송하기 시작한 날이다. 하지만 강력한 폭풍에 수천 명의 주민은 집을 떠나야 했다. 그중 일부는 영영 자신의 거처에 돌아올 수 없게 됐다. 투표용지 배송은 물론 최소 13개 카운티에서 선거를 위해 설치했던 투표소와 시설이 붕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월9일에는 허리케인 밀턴이 다시 플로리다에 상륙했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CNN방송에 따르면 헐린으로 플로리다 등 6개 주에서 최소 22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밀턴은 최소 2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약 20년 만에 미국 본토를 강타한 치명적인 폭풍으로 목숨을 위협받은 남동부 주민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이자 역대급 박빙 선거로 예상됐던 대선이 ‘남의 얘기’가 됐다.
2024년은 76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슈퍼 선거의 해’다. 올해 전 세계 선거에선 ‘인공지능(AI)’과 ‘정치 양극화’ 등에 따른 선거 조작과 혐오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의외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극한 기후로 인해 투표소가 사라지고 선거관리위원과 유권자가 사망하는 등 기후변화가 주요 ‘선거 변수’가 된 것이다.
◆홍수·폭염에 선거 먹구름
지난 2월 총선이 치러진 인도네시아에선 투표 시작 전부터 강한 뇌우와 홍수로 차질이 빚어졌다. 중부 자바주 드막 지역에선 홍수로 인해 108개 투표소가 운영되지 않았고, 자카르타의 일부 투표소는 홍수로 인해 침수됐다.
결국 하심 아시아리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위원장은 선거가 공식 종료된 후 자연재해, 치안 문제 등으로 “4개 주 5개 지역의 668곳 투표소에서 투표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며 후속 투표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는 유권자 2억500만명 중 재외국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표를 하루 6시간 안에 마치게 하는 게 원칙인 것을 고려하면 예외적인 결정인 셈이다.
지난 4월부터 6월1일까지 진행된 인도 총선에선 폭염으로 최소 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섭씨 5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투표소를 오가거나 투표를 위해 줄을 서 있다 사망하는 유권자는 물론 선거를 관리하는 직원들도 피해를 보았다.
총선 마지막 날 한 주에만 선거 사무원 33명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선 투표소 인력 33명이 온열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들 중에는 투표소 경비원과 환경미화원도 포함됐다. 당시 우타르프라데시주의 기온은 46.9도로 기록됐다. 사망자 가족에겐 150만루피(약 2490만원)의 금전적 보상이 제공된 것으로 전해졌다.
알제리 대선에선 폭염으로 국민이 투표를 거부할 것이란 우려에 투표 마감 시간이 연장되기도 했다. 알제리의 경우 군부가 지지하는 압델마지드 테분 대통령이 무난히 재선에 성공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문제는 저조한 투표율이었다. 지난 9월7일 진행된 선거에서 투표소들은 대체로 텅 빈 상태였다. 일부 지역의 극심한 폭염으로 사람들이 투표소를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제리의 경우에는 폭염으로 인해 투표 날짜를 변경할 정도로 폭염이 선거에서 주요 쟁점이었다.
선거 유세 현장 역시 기후변화와의 싸움이었다. 미국 대선의 경우 지난 6월부터 3개월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유세에 참여한 사람 중 최소 78명이 열사병으로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집회에서도 참석자 한 명이 열사병을 앓으며 집회가 중단됐다.
경합주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는 미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로 알려진 피닉스와 라스베이거스가 위치해 있다. 특히 라스베이거스의 경우 지난 6월 기온이 37.7도 이상이었던 날이 28일에 달할 정도다.
해리스 부통령의 러닝메이트였던 팀 월즈 미네소타주 주지사는 지난 8월7일 위스콘신주 오클레어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 한 명이 열사병에 괴로워하자 잠시 연설을 멈추기도 했다. 그는 “물 좀 마시세요. 여러분,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라고 말한 후 “서로를 돌보세요”라며 더운 날씨를 우려하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기후변화로 더위가 길어지고 더 심해지면서 모든 종류의 야외 행사가 복잡해지고 있다”며 “특히 무더운 선벨트(미국 남부) 지역은 물론 계절에 맞지 않게 더워진 중서부 지역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짚었다.
◆기후변화에 유권자도 ‘흔들’
기후변화가 일상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유권자들 역시 기후변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영국인 2만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보수당이 기후위기 대응에 필요한 정책을 계속 반대할 경우 의석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영국 유권자의 경우에는 환경과 기후변화 문제를 경제, 건강, 이민 문제에 이어 4번째로 중요한 의제로 꼽기도 했다.
리시 수낵 전 영국 총리는 2030년 시행 예정이었던 내연기관차 운행 금지를 5년 연기해 “기후정책이 후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22년에는 취임 사흘 만에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 불참을 선언하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당시 그는 “정부 가을 예산 편성 등 더 급한 국내 공약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전년도에 영국이 COP26 의장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수낵 전 총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계속된 비판에 수낵 전 총리는 결국 마음을 바꿔 COP2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영국과 달리 기후변화보다는 ‘먹사니즘(먹고사는 문제)’이 표심을 가른 국가도 있다. 지난 6월6일부터 9일까지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선 극우정당이 약진했고 녹색당은 자리를 잃었다. 2019년 선거에서도 극우정당이 인기를 끌고는 있었지만 ‘녹색당-유럽자유동맹’ 소속 정당 역시 많은 의석을 확보했었다.
특히 독일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독일에서 기후정책을 주도하는 녹색당은 2019년 선거에서 20.5%로 2위를 기록했다.
당시 극우정당이던 독일대안당은 11%를 얻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은 11.9%를 득표했고 독일대안당은 15.9%를 얻었다. 녹색당은 득표율이 떨어졌지만 독일대안당은 4.9%포인트나 증가한 것이다. 독일 시민들의 관심사가 기후변화 및 환경보호에서 사회보장과 이민자 이슈 등 먹고사는 문제로 옮겨간 탓이었다.
미국 대선에선 기후변화를 ‘사기극’이라 주장하는 트럼프 당선인과 기후변화 대응 등 진보적 입장을 유지한 해리스 부통령의 정책 차이가 극명했다. 여기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석유 시추를 늘리자며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외친 트럼프 당선인이었다. 인플레이션에 지친 국민은 세금을 깎아주고 제조업을 부활시키겠다며 ‘경제 해결사’를 자처한 공화당에 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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