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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광복조국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입력 : 2024-11-23 06:00:00 수정 : 2024-11-22 02: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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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250만 귀환자·월남인 등 유입
공동체 틀 못 갖춘 사회적 모순 가득
멀고 살기 위해 사창가 모여든 여성들
식량창고 터는 부랑자·학대 피해 어린이
美군정 오판·실정으로 인한 고난 조명
고국 돌아온 이들 꿈, 냉대 속에 식어

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이연식/ 역사비평사/ 1만9800원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뜻한다. 저자는 타국살이를 끝내고 원래의 본토로 돌아가는 자들의 행로와 마음을 응시한다. ‘역 디아스포라(reverse diaspora)’의 드라마다. 그곳에 조국이라는 미명의 공동체가 있었으나, 동시에 그곳은 싸움질만 하는 아수라, 제 욕심만 부리는 아귀, 못된 악업만 쌓는 축생들의 도가니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약 1600만명이 살던 남한에는, 불과 1~2년 만에 100만명의 일본인이 돌아가고, 250만명의 귀환자와 초기 월남인이 유입됐다. 이것만으로 이미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던 셈이다. 아직 공동체로서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해방된 조국’은 지독한 사회적 모순만 드러내고 말았다.

 

이연식/ 역사비평사/ 1만9800원

고생 끝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으나 기대와 달리 해방의 혼란 탓에 몸살을 앓고 있던 남한 사회와 마주하게 된다. 먹고살기 위해 사창가로 모여든 여성들, 주린 배를 채우고자 식량 창고를 터는 사람들, 말투가 달라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이들, 노점상을 시작했지만 기존 상인의 텃세와 폭력배의 갈취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끝도 없이 밀려드는 유입자들로 인해 집, 쌀, 일자리 등이 줄어들자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기주민(旣住民)들의 따가운 시선이 돌아온다.

강제동원피해자들은 대부분 조그만 밀선에 의지해 현해탄을 건넜다. 사망자, 미귀환자가 대거 발생한 원인이다. 공식 송환선을 타기까지 한두달 버텨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해방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이 부산∼시모노세키 항로가 기뢰 제거작업으로 통제되자 센자키항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3장)

책은 일본인의 송환과 유입되는 조선인의 수용 국면에서 미군정의 잘못된 판단과 실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했는지를 조명한다. 구 일본인 재산의 섣부른 처리가 각종 편법을 동원한 투기와 사재기를 조장하고, 그 속에서 사욕만 채우려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자극하게 된 과정을 소개한다. 이는 부의 편재를 심화한 데 그치지 않고 남한 사회의 체질을 왜곡시켜 장기간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해방 공간에서 비리의 온상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된 고급 요정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들여다본다. 특히 조선 제일의 명기들이 가득하다는 고급 요정의 상징인 명월관의 포르노 상영 사건이 몰고 온 엄청난 사회적 후폭풍을 이야기한다. 한사코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의 공익적 활용에 반대하고 요정과 유곽을 집 없는 귀환자, 월남민, 도시 빈민에게 개방하자는 사회적 요구를 애써 외면한 이유는 뭘까. 이미 그 공간들을 차지하고서는 내놓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영화 ‘경성’(1940)은 해방 직전 요정의 술자리 문화를 담고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남한에서 새 삶을 살아보겠다던 귀환자나 초기월남민의 원대한 꿈은 열악한 정착 환경과 더불어 남한 사회의 ‘냉대’ 속에서 식어갔다. 1946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급증한 만주 재이민과 일본 재밀항 현상은 해방 직후 신국가 건설의 열기라든가, 민족주의의 고조 속에서 한껏 물신화된 ‘국가’와 ‘민족’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먹을거리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한 조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이러한 남한의 구호 능력과 사회적 통합 능력의 취약성은 오랜 식민 지배로 인해 구조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군정의 점령 통치로 인해 이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회적 구호 요구가 무시된 결과, 남한 사회는 귀환자, 월남민, 도시 빈민에게 있어 ‘비정한 조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웃사촌이라고 믿었던 주변 사람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피를 나눈 동포’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헛된 신화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5장)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지역에서, 이 같은 대규모 인구이동에 따른 변화들은 정도와 맥락의 차이는 있지만 글로벌한 현상이었다.

본문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전후 인구이동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정리한 대목이 눈에 띈다. 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달리 해방 후에도 여전히 타지에 ‘남은 자, 남겨진 자, 돌아오지 못한 자의 그림자’를 언급한다. 해방 후 왜 ‘60만 명’이나 되는 ‘재일동포’가 모국 귀환을 단념하게 되었는가, 또 그로부터 1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약 10만명에 달하는 재일동포가 남한에 연고를 두고 있으면서도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가(귀국 운동·북송 문제), 그리고 해방 후 최초의 귀국선이 될 수도 있었던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후 제대로 된 진상 조사나 사후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등을 거론한다. 아울러 미군 점령 지구의 귀환 환경과는 전혀 달랐던 소련 점령 지구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반세기 이상 집단 억류 상태에 있었던 ‘사할린 한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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