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선 토속신앙 존중도 했지만
21세기 정치권의 무속논쟁이라니…
아연실색한 시대적 낙오에 암담
요즘 정치판 뉴스를 보면 유명 정치인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 무속적인 믿음을 가지고 이를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당내 경선 텔레비전 토론회 때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써 와서 이를 온 국민이 다 지켜볼 수 있었다.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 것에도 무속인의 개입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 대통령 관저 이전에 무속인 아무개가 관여했다는 주장이 나오자, 경찰이 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풍수지리가 한 사람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풍수지리가는 예전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이 구속된 것은 청와대 터가 좋지 못하기 때문이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권력 주변 인물들이 영적 대화를 나누고 서로 공감했다는 증언이 있어 온 나라가 들끓었다. 21세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정치권력의 최상부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라 그저 의아하고 아연실색할 뿐이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부족국가 이전에는 무당이 곧 정치권력자였다고 하니, 그 전통이 10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정치권력과 무속의 결속이 이 정도이니 전통사회에서 권력과 무속의 연결고리는 대단했을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지만, 예전부터 면면히 내려오던 다양한 민간신앙과 함께 자신이 혁파했던 불교의 기복적인 측면에 매달리기도 했다.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흥천사(興天寺)’라는 원찰(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을 세워 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여러 임금과 왕족도 원찰을 두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왕조의 이념이 배척한 불교에 귀의한 셈이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어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까워 임금이라도 100년을 못 사는 한 인간으로서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대한 보증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나라에서 토속신앙도 인정하고 지원했는데,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산단(山壇)과 백운사(白雲社), 그리고 부군당(府君堂)에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모습은 순조 30년(1830) 무렵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산단은 땅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그 위에 네모 반듯하게 잘 다듬은 넓적한 돌을 상석(床石)으로 두고 그 주변을 야트막하게 장대석으로 경계를 표시한 단순한 형식이었다. 가뭄이나 홍수 혹은 역병이 창궐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상석에 제물을 올려놓고 산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곳이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임금이 친히 산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거행했고, 정조 때의 ‘일성록’에는 산단에서 제사 지낼 때 아악(궁중에서 연주되던 곡)을 연주한다고 했다. 산단 바로 옆에 있었던 백운사는 정자처럼 생긴, 문을 굳게 닫은 한 칸짜리 아담한 건물인데, 아마도 산단과 연계된 토속신이나 신주를 모셨을 법하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산신령 등 토속신에게 제사 지낼 때 국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정자 능허정(凌虛亭)은 임금이 겨울에 눈 구경하던 곳인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부군당이 있었다. 부군당은 창덕궁 후원을 감싸고 있었던 담장 바깥에 있어 후원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이었으니 아마도 유교 왕조 조선의 대궐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곳이었기 때문일까. 부군당은 부근당(付根堂)이라고도 했으며 서울, 경기 지방의 관청에서 터주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으로 이긍익(1736∼1806)이 쓴 역사서 ‘연려실기술’에 이를 설명한 내용이 보인다. “서울 안에 있는 관청에는 으레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해 두고 지전(종이돈)을 빽빽하게 걸어두고 부군당이라 부르며 서로 모여 제사 지냈다. 새로 임명된 관원은 반드시 더욱 정성을 들여 제사를 올렸고 법사(형조와 한성부)라도 그처럼 하였다.”
토속 신앙에 대한 믿음은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조선 최고의 관청인 궁궐 내에 부군당을 차려 놓고 제사 지내며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대간(임금에게 옳고 그른 일을 아뢰던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이 임금에게 누군가가 양현고(성균관 유생에게 주는 양식을 맡아보던 관청) 안 동산에서 고사 지냈다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문제 삼았다. 이에 임금이 대비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대비는 원래 양현고 안에는 그동안 제사 지내온 부군당이 있다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모르는 체했다. 유교적 신념이 몸에 밴 조선의 관료는 다른 곳도 아닌 대궐에서 무속이 행해지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임금은 이를 왕실 여성의 관례로 보고 인정했다.
조선에서는 나라에서 굿을 주관하기 위해 도성 안에 나라의 무당인 국무당(國巫堂)을 두었다. 가뭄이 들면, 나라에서는 으레 무당을 모아서 굿을 하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1년(1411)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대국제(나라에서 지내는 여러 제사)를 혁파하였으나 국무당만은 예외였다.
21세기, 세계 각국이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양자컴퓨터와 에너지 자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인공 태양 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는 무속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시시대 이래 전해진 정치권력의 유전자인지 시대의 낙오자인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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