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상처·피해는 아랑곳없이
與, 식물대통령 두고 ‘섭정’ 운운
민의 배제한 수습책은 ‘2차 가해’
위법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가적 혼란을 일으킨 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되면서, 여당에서는 ‘질서 있는 퇴진’으로 정국을 수습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들이 ‘임기 단축 개헌’, ‘책임총리제’와 ‘거국내각’인데요. 한밤중에 이루어진 느닷없는 계엄령에 계엄령의 법률적 근거와 효과와 선례에 대하여 황급히 공부해야 했던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는 또 생소하고 낯선 용어들을 찾아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헌법에 통달한 전문가가 되게 생겼으니 그야말로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웃픈’ 상황입니다.
임기 단축 개헌은, 현재 5년 단임제로 되어 있는 대통령의 임기를 헌법 개정을 통해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대신 윤 대통령 본인은 중임제 허용 대상에서 제외하여 임기 단축 효과를 가져오자는 방안입니다. 이렇게 되면 2026년 6월 지방선거와 대선을 동시에 치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개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나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면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 30일 내 국민투표에 부쳐 선거권이 있는 국민 과반의 투표와 그중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4년 중임제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 중임제는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지만, 장기 집권 독재자를 등장시킬 위험도 있습니다. 현재의 대통령 단임제는 민주화 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역사적이고 국민적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되어 1987년부터 유지되어 온 것으로, 대통령 한 명을 조기 퇴진시키려는 목적으로 함부로 건드리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중임제는 연임제와 달리 횟수와 관계없이 몇 번이고 대선에 출마하고 대통령으로 뽑힐 수 있어서, 오히려 지금보다 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제도입니다. 권력의 불균형이 초래되기 쉬운 단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중임제가 아닌 연임제를 두어, 대통령이 2선 출마할 수 있는 것은 직전 임기 종료 후 바로 다음 임기 선거이고, 차기 대선 패배 시 더 이상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도록 제한해 둔 것인데, 대통령의 자의적인 권한 행사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진 지금 시점에서 갑자기 중임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상합니다.
책임총리제는, 헌법상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우선 보좌기관으로 되어 있는 국무총리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여 대통령의 자의적인 권한 행사를 견제하는 것입니다. 책임총리제란 엄밀히 말하면 헌법이나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 제도는 아니고, 그저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 행사 범위와 방식을 조율하는 일종의 스타일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행 헌법상 국무총리는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권한, 국무회의 부의장으로서의 권한, 국무위원과 중앙행정기관의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 국회 출석 발언권, 총리령 발언권, 대통령 궐위 시 권한대행권 등을 갖습니다. 다만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이와 같은 권한들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기보다는 그저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바타 총리’가 되기 마련이었는데, 여기서 권력의 중심을 총리 쪽에 좀 더 실어주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이미 헌법에 있는 내용을 실천하겠다는 정도에 불과하여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는 국민이나 의회가 뽑는 선출직이 아니라, 대통령에 의한 임명직이라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총리는 자신의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태생적으로 거스르기 어려워, 결국 분란을 일으키고 쫓겨나거나 힘을 잃거나 둘 중 하나가 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책임총리를 천명하며 취임했던 이회창 총리가 겨우 4개월 만에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인해 사퇴하였던 사례가 있습니다.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사람이 사실상 대통령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야당과 국민이 반발할 것도 뻔히 예상되는 상황입니다. 어리고 약한 군주를 대신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섭정’을 내세우려는 게 아니냐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도, 여당에서는 김병준 교수를 책임총리로 내정하여 ‘2선 후퇴’를 하고자 하였으나, 여당 내부 일부 및 야당의 반대로 책임총리제는 해보지도 못하고 끝났던 바 있습니다.
나름대로 중립을 유지하고 야당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마지막으로 얘기가 나오는 것이 거국내각인데요. 이 또한 헌법이나 법률에는 나와 있지 않은 정치 용어입니다. 거국정부라고도 하는데, 특정한 정당이 아닌 야당과 정당이 각자 추천한 장관, 비서실장, 정책실장 등을 중심으로 행정부를 끌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 또한 대통령이 내각 구성권을 쥐고 있는 한 얼마든지 입맛에 맞게 갈아엎을 수 있어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야당은 대통령 탄핵만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서, 거국내각 구성에 협조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국민은 저 세 가지 방안 중 그 어떤 것도 먼저 요구한 적도 동의한 적도 없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 사태에 대하여 대통령이 마땅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국민의 손으로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수장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국가 위신 추락과 경제 불황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손실에 직접적으로 타격받는 것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국민입니다. 지금 운영 중인 치킨집 폐업을 걱정해야 하는, 미국에 유학 가 있는 자식에게 돈을 부쳐주어야 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물건을 팔아야 하는 서민들입니다. 그들의 의견과 목소리는 완전히 배제한 채 개헌이니 책임총리니 거국내각이니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건, 형사사건 피해자는 원치도 않는데 제3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저렇게 합의하자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린 그걸 ‘2차 가해’라고 부릅니다.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할 만한 시간적, 인적 자원이 있다면, 차라리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하는 게 낫겠습니다. 우리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해 줄 대통령을 원하지, 식물 대통령의 배후에서 감 놔라 배 놔라 명령하는 섭정을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아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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