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종료 후 너도나도 ‘거리 청소’
간식 ‘선결제’로 시민에 무상 제공
영유아 등 배려 ‘키즈버스’ 등장도
외신 “축제 같은 집회문화 보여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를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탄핵 찬반 집회가 열렸지만,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양극화에도 충돌로 번지지 않은 기저에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탄핵 찬성 집회에는 경찰의 비공식 추산 20만8000여명이 운집했다. 비슷한 시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는 4만1000여명이 모였다. 대규모 인파가 도심에 집결했지만, 경찰에 체포돼 연행되거나 한랭질환으로 병원으로 이송된 시민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탄핵 찬성 집회가 주를 이룬 여의도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단체의 서명·모금운동도 있었으나 시민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한 보수단체 회원이 경찰과 잠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충돌로 번지지는 않았다.
탄핵안이 가결되고 집회가 종료된 오후 6시쯤에는 시민들이 여의도를 빠져나가면서 피켓과 음식물 쓰레기, 일회용 컵 등이 거리에 나뒹굴기도 했지만, 남은 시민들이 쓰레기를 모두 수거하며 거리를 정돈했다.
서울 구로구의 자영업자 홍모(57)씨는 직접 챙겨온 75ℓ 쓰레기봉투를 꺼내 쓰레기를 담았다. 주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쓰레기봉투는 순식간에 채워졌다. 홍씨는 “쓰레기를 줍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며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집회에 참여한 뒤 쓰레기를 치우던 대학생 하민지(23)씨는 “너무 기쁜 날인데, 축하주 마시러 가기 전에 쓰레기를 줍는 것도 기쁜 일”이라고 했다. 대학생 이윤슬(23)씨도 “지하철이 혼잡해 쓰레기나 조금 줍고 가야지 했는데, 시민분들이 다 같이 도와주셔서 크게 어렵지 않았다”며 “중년 부부가 종량제 봉투를 주고 가시고, 푸드트럭 사장님이 비닐장갑을 주시는 등 많은 분들이 도와줬다”고 말했다.
영하권의 추운 날씨에도 시민들은 따듯한 나눔으로 온기를 더했다. 미주 한인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의 모금으로 설치된 4대의 푸드트럭에서는 어묵을 제공했고, 충남 당진의 한 카페 사장은 시민들에게 커피를 무료로 나눠줬다.
특히 이번 집회에선 ‘선결제’ 문화가 새로운 집회 참가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집회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시민들이 집회 현장 인근의 상점에 미리 결제해 두면 시민들에게 커피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나선 대학생 김민정(19)씨는 “선결제된 커피도 마시고 여러 간식도 받았다”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 발 벗고 나선 시민들의 힘을 확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집회 참가자를 위한 ‘키즈 버스’도 등장했다. ‘탄핵 촛불에 참가한 영유아와 보호자를 위한 키즈버스’라는 현수막이 걸린 두 대의 전세버스는 휴식공간을 제공했다. 이 버스는 ‘서울시민 16개월 지우맘’이라고 밝힌 한 시민이 아이 500일 기념 여행비를 털어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던 집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평화 집회였다”며 “특히 영유아를 유모차에 태우고 온 젊은 부부가 많았는데, 그들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평했다.
외신들도 이날 서울 도심의 평화로운 집회 현장을 비중 있게 다뤘다. AP통신은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K팝 응원봉을 흔들었다”며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단체도 평화로웠다”고 전했다. 영국 BBC방송은 “집회 참가자들이 기발한 깃발로 창의력을 과시하고 있다”며 시민들이 집회를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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