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창시·동학농민전쟁 시작으로
20세기초 대종교 흐름까지 담아내
동학농민전쟁 겪은 작가 3년간 답사
경험 바탕 천도교 혁신운동까지 서술
동학사 전반 구체적인 이해에 큰 도움
동학사/ 오지영/ 김태웅 역해/ 아카넷/ 3만3000원
“(관군) 선발대는 잇달아 발사하며 동학 진중을 쫓아 들어간다. 선발대의 뒤를 따른 보부상과 관병들은 가소롭다는 생각하고 승승장구로 마치 평지를 밟는 것같이 쫓아 들어갔다. 선발대가 가는 데로 의심 없이 막 뒤덮어 들어간다. 중봉의 허리를 지나 중봉의 꼭대기까지 거침없이 들어섰다. 동학군의 진지는 이미 비워 두었기 때문에 관병은 동학군이 다 쫓겨 달아났다는 생각으로 함부로 대들고 들이덤볐다. 한참 이렇게 할 즈음에 그 산의 동, 서, 북면으로 나뉘어 은신하였던 동학군들은 일시에 에워싸며 관병들의 뒤를 쳐들어갔다. 이겼다고 안심하고 있던 관병들은 졸지에 낭패를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멸망당하였고, 약간의 도망한 군사들은 또 복병을 만나 모두 몰살당했다.”
1894년 음력 4월7일(양력 5월11일), 전라도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전북 정읍)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감영군 2000여명을 격파한 이른바 ‘황토현 전투’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오래전 전투임에도, 마치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 두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중의 참여 속에서 아래로부터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힐 수 있다. 사건의 폭발력도 컸기도 하거니와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건은 놀랍게도 동학과 이를 계승한 천도교가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계속 실패해 온 역사라고 이해되기도 하는 동학의 역사가 알고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한 변곡점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최제우의 동학 창시부터 시작해 동학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등을 거쳐서 20세기 초 대종교의 흐름까지 동학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으로 알려진 오지영의 ‘동학사’가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번역과 주해로 새롭게 출간됐다.
1868년 고창에서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오지영은 동학농민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고 오랜 은신 뒤에 천도교 혁신운동을 벌였으며 1926년 만주 지린성에 이주해 공동체 건설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도교 혁신파 활동이 좌절하자 1935년 서울로 돌아온 뒤 집필에 몰두했다가 1950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영창서관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처음 간행됐고, 해방 이후 일반에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천도교 일각과 학계에서는 영인본 형태나 국한문 형식의 책자로 단속적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책은 동학농민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40년에야 출간되고, 제목에 ‘소설’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고부 민란과 제1차 농민전쟁 봉기 시점의 혼선을 비롯해 일부 사실에 오류와 과장이 섞여 있다는 점 등은 한계로 지적돼 왔다.
그럼에도 ‘동학사’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저자가 직접 3년 동안 전쟁 현장을 답사하고, 당사자와 후손을 만나서 후일담을 전해 듣기도 했으며, 경성제국대학 규장각에 있던 ‘승정원일기’를 열람하고 인용해 객관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전쟁의 대표적 사료로 꼽혀 왔다. 특히 ‘토지평균분작사’를 비롯해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조가 기록된 거의 유일한 사료이고, 민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동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채록돼 담겨 있다. 일본 가지무라 히데키로부터 “안쪽으로부터 민중 운동자의 감각으로 쓰여졌다”는 상찬을 받기도 했다.
“천도교를 동학이라고 부른 것은 그때 서학을 상대로 해서 나온 말이다. 그 이름이 동학이라고 하여 다만 동(東) 하나만 뜻한 것이 아니고 그 도가 사람을 하늘님이라고 하느니만치, 사람이 있고 하늘이 있는 곳은 동서남북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무편무당으로 나아가야 옳다고 하는 바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동학을 이렇게 정의한 뒤, 동학의 시작부터 시작해, 도의 계승과 동학농민전쟁, 천도교로의 전환과 민회운동, 교단의 분열, 천도교 혁신운동 순으로 동학사를 서술해 나간다. 최제우가 동학의 원리를 득도하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최제우) 선생은 뜻밖에 심신이 무섭고 오싹해지며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눈에서 무엇이 보이는 듯 그것을 형용코자 하여도 형용할 수 없었다. 하늘님 말씀이라고 하며 말하길, ‘영부(부적)를 받으라, 주문을 받으라, 창생을 건지고 덕을 펴라’ 하였다…. 이어 11일 동안 앉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식음을 아주 끊어버리고 중대한 맹세를 결단하였다. ‘내가 반드시 대도를 깨닫기 전에는 이 밥을 아니 먹으리라’ 하고 죽기로써 마음을 세웠다. 이같이 지나는 동안 갑자기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자각이 생겨 수심정기의 법을 정하였다.”
책의 서술 체계는 기존 동학사를 다룬 책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우선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로 이어지는 교주 중심의 서술이 아닌 창도 단계와 계승 단계로 서술한 뒤 천도교사는 천도교 혁신운동을 중심의 주제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을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등의 교주 반열에서 다루는 점도 특이하다.
“기미년 3월1일 조선 안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천도교 선생 손병희를 우두머리로 천도교 수령급으로 있는 몇몇 사람과 각 사회단체에서 이름 있는 몇몇 사람을 합하여 33인의 명의로 ‘조선 ○○선언서’를 세상에 널리 퍼뜨려 소위 기미운동이 일어났다.”
다만 3·1운동에 대해선 매우 짧게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만세운동을 이처럼 ‘큰 소동’으로 표현하는 등 아쉬움도 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을 ‘소요사건’으로 규정해 사건을 다루는 것 자체를 볼온시하는 상황에서 일제의 검열과 규제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책은 생생한 동학농민전쟁을 비롯해 동학사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역해자의 이야기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개별 근대사, 개별 사상서, 개별 문학서를 넘어 총체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문사철의 종합이자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인 셈이다. 독자들께서는 오지영의 ‘동학사’를 읽음으로써 13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민중들의 꿈과 함성을, 박제화된 지식이 아닌 따뜻한 지성 속에서 그리고 전형화된 이론이 아닌 역동적인 역사 속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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