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tractor)는 농업의 기계화와 자동화에 필수적인 장비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트랙터의 의미는 ‘무거운 짐이나 농기계를 끄는 특수 자동차’다. 우리는 트랙터 하면 농촌에서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특수 차량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보다 쓰임새가 훨씬 더 넓은 셈이다. 실제로 트랙터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해서 흔히 ‘경운기’로 불리는 20마력대 소형 트랙터부터 군용 전차(탱크)를 능가하는 600마력대 대형 트랙터까지 있다. 1마력이 무게 75㎏의 물체를 1초에 1m만큼 수직으로 들어올리는 데 들어가는 일률(power)이란 점을 감안하면 제아무리 소형 트랙터라도 그 힘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잘못 가동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트랙터가 오늘날 ‘지상전의 왕자’로 불리는 탱크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트랙터에서 ‘무한궤도를 장착하고 화포로 무장한 전투용 차량’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트랙터의 바퀴를 무한궤도로 바꾸고 차체 위에 포탑을 얹은 다음 두터운 장갑(armor)으로 몸통을 둘러싸면 탱크와 제법 비슷한 생김새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현 러시아)은 탱크 대부분을 트랙터 공장에서 생산했다. 전쟁 기간 소련은 미국의 무기대여법에 따라 미국산 트랙터 8000여대를 제공받았는데, 그중 일부는 농장으로 보내졌으나 상당수는 탱크 등 군용 차량으로 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9월9일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9·9절)을 맞아 평양에서 열린 심야 열병식에 트랙터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트랙터와 122㎜ 방사포를 연결한 뒤 트랙터로 하여금 방사포를 견인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놓고 섣불리 ‘북한군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단정해선 곤란하다. 이날 열병식에 참여한 노농적위대는 우리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부대다. 최정예 부대와 비교해 다소 뒤떨어지는 무기 체계를 보유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트랙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파손돼 전장에 버려진 러시아 탱크 등을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트랙터로 견인해 이동시키는 광경이 종종 포착됐다. 이렇게 옮겨진 러시아제 탱크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우크라이나군의 활약상을 널리 알리는 선전에 활용됐을 것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적인 퇴진과 구속 수사를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를 벌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트랙터 25대를 앞세운 전농 시위대가 21일 정오 무렵부터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차벽을 치고 시위대의 시내 진입을 막으려는 경찰과 28시간 동안 대치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일부가 트랙터로 경찰 버스를 들어 올리려고 시도하는 등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졌다. 22일 오후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의 개입으로 경찰이 철수하자 시위대는 트랙터 10대를 이끌고 급기야 용산 대통령 관저 앞까지 진출했으니 그저 아찔할 따름이다. 트랙터 시위는 일단락이 되었으나 무기력한 공권력에 한숨이 절로 난다. 전시도 아닌데 농사에 쓰여야 할 트랙터를 무슨 무기처럼 이용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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