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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덩이 같은 해… 새 희망이 떠오른다 [2025 신년시화]

입력 : 2025-01-01 07:00:00 수정 : 2024-12-31 2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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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습니다

이경림

갓 구어 낸 빵 냄새 같은 것을 데리고
새해가 왔습니다 어머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데리고
새해는 왔습니다

무한천공에 홀로 이글거리는 해를 데리고
코끝 쨍한 겨울바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

지난하고 시끄러운 어제는
없던 일로 하자고
간밤 어지러운 꿈들은 잊어버리자고

쪼롱쪼롱 깍깍깍

새들 노래합니다
크고 작은 이파리들을 흔들며
바람이 중얼거립니다

-제발 좀 다투지 말라고

갓난아기는 울음으로 말하고
개들은 허공을 짖습니다

새해가 왔다고

하늘은 뭉게구름 한 무리를 띄우고
멀리, 산등성이 몇을 보여줍니다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뻐꾸기 울음을 들려줍니다

새해가 왔다고

빨갛게 경고등을 켠 차들은 줄을 서서
강의 아우트라인이 되고 있는데

제 속에 환하게 불을 켜고 전철은
강을 건너는데

오늘도 아버지는 고압선을 손보러 출근하시고
어머니는 대파 대궁이 삐죽 솟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모퉁이를 돌아오시고
아이들은 놀이터 동굴 집에 들어가 깔깔거리고

광장에는
소리들이, 빛들이 출렁거립니다
새해가 왔다고

이따금 어머니는 말씀하셨지요
도대체 너는 왜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니
너는 왜 또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 나올 줄 모르니
저기, 공공 근로를 마친 노인들이
구부정한 어깨로 느릿느릿 지나가는 것 보이지 않니

미요, 미요

어딘지 배고픈 고양이가 울고 있구나
어미를 잃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아파트 뒤 후미진 바위에 배고픈 들고양이처럼 누워 보지
않고는 모르지

하늘이 얼마나 깊은 못인지
한순간 스러지기 위해 구름이 어떻게 소용돌이치는지

등짝만 한 바위를 에워싸고
얼마나 많은 잡풀들이 살고 있는지

누군가 먹다 버린 과자 봉지에 머리를 박고 나오지 못하는
생쥐 한 마리는 비틀비틀
어디로 가는지

새해가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창 속에서 오늘 우리는
새로 태어난 식구들과 둘러앉아
즐겁게 밥을 먹어야 합니다

끓는 찌개 속으로 연신 숟가락을 들이밀며
익은 애호박을 건져 먹어야 합니다

멸치라고 부르는 것들이 새우처럼 오그리고 있는
접시를 넌지시 서로 밀어주며

 

◆무제 21(130×130㎝)

 

해와 달, 별의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우주의 모습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화면과 대상 속으로 침입해 그림을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 도달시키고자 한다. 이를 통해 레이어의 누적으로 형성되는 조형성과 시간성이 고유의 회화성이 되길 바라며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이미 그린 그림 위에 그리고 또 그려서 이미지들의 중첩과 누적으로 파편화한 화면을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 같은 중첩된 이미지가 익숙한 화면에서 새로운 화면으로 시선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의 초기작은 동식물 도감이나 자연물 사진집을 한 권 골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든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 속에 모두 그려 넣는 형식이었다. 한 화면에 사계절을 다 담기도 했다. 그렇게 기록하듯 그린 것들이 쌓이다 마침내 중첩된 풍경과 서로 다른 시간이 혼재된, 공존할 수 없는 순간들이 펼쳐졌다.

 

■이경림 시인

 

△1947년 문경 출생 △1989년 시 ‘굴욕의 땅에서’ 외 9편을 ‘문학과 비평’에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급! 고독’ 등 발표 △엽편소설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등 발표 △지리산문학상, 윤동주서시문학상, 애지문학상 등 수상

 

■허수영

 

‘허수영 개인전’(학고재, 2022·2016), ‘허수영 개인전’(63아트미술관, 2018), ‘Recent paintings’(인사미술공간, 2013)를 포함한 8회의 개인전과 ‘노래하는 땅’(부산현대미술관, 2024), ‘In Bloom’(하이트컬렉션, 2021), ‘DMZ’(문화역서울284, 2019)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타이베이 아티스트 빌리지,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몽인아트스페이스, 금호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등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신세계미술제(2012)에서 대상을 받았다. 서울과학기술대에서 조형예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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