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여년 지났지만 후대에 감동
韓, 극지 연구에 중요 역할 수행
차세대 쇄빙선 건조 포기 말아야
1912년 1월 18일 영국 해군 장교이자 남극 탐험가인 로버트 스콧이 남극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거기에는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다.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한 달 전에 도착한 것이다. 최초 정복자라는 타이틀을 놓친 스콧은 절망을 가슴에 담고 귀환 길에 올랐지만 극한 환경 속에서 팀원들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스콧 원정대의 이름은 테라노바(Terra Nova). 새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을 담은 이름이다.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다는 첫째 목표는 실패했지만 우리는 스콧의 탐험을 실패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빙하 샘플, 기상 데이터, 생물학적 표본과 지질학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극지 환경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일기는 인간의 취약성과 품위를 동시에 드러내며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3월 29일에 남긴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끝이 머지않은 것 같다. 슬프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스콧 이후 선진국들은 극지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극지는 지구 환경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남극과 북극은 지구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조절 장치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주요 신호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다. 이곳의 방대한 얼음과 눈은 지구의 에너지를 반사하고, 해류와 대기의 순환을 조절해 전 세계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극지는 기후 변화의 속도와 범위를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빙하와 얼음층에 저장된 공기와 먼지 입자는 수천 년간의 기후 변화를 기록해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준다. 최근 북극과 남극의 얼음 감소와 해수 온도 상승은 지구의 기후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극지 데이터는 변화의 원인과 영향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극지는 독특한 생물다양성과 해양 생태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장소다. 기후 변화로 극지 생태계의 구조와 먹이사슬이 재편되고, 이는 해양 생물과 전 세계 어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극지 연구는 기후 변화 대응 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며, 지구의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열쇠다.
대한민국 역시 국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남극의 세종기지와 북극의 장보고 기지를 거점으로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연구 등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쇄빙선 아라온은 한국의 극지 연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남극과 북극을 누비며 빙하를 관측하고 생물 표본을 수집하고 기후 데이터를 분석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연구 성과의 확대가 점차 한계에 달하고 있다. 남극과 북극 사이의 그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단 한 대의 쇄빙선이 모든 연구 수요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추가 쇄빙선의 필요성은 명확하다. 연구 지역을 확장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추가 쇄빙선은 필수적이다.
극지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극지 환경에서의 기술 개발은 항공우주, 에너지, 환경 분야에서도 응용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로 점차 현실화하는 북극 항로연구는 극지 국제 협력에서 우리나라가 주도적 역할을 하게 할 것이다. 경제적, 외교적 가치가 크다는 말이다. 극지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 시대에 한국의 과학적, 경제적,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필수적인 투자의 첫걸음은 추가 쇄빙선이다.
스콧의 비극이 있고 난 뒤 북극 부근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4월 15일 타이태닉호가 침몰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가 (비록 빙산의 일각이라고는 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이 채 20m도 되지 않는 빙산에 충돌한 후 침몰했다. 얼음이 이렇게 무섭다. 영화 타이태닉에서 잭은 간절하게 외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한국극지연구소 연구자들에게도 똑같이 외치고 싶다. 차세대 쇄빙선 건조를 포기하지 마시라! 극지는 여전히 테라노바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