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비석 뽑히고 일본군 동상 건립 등 수난
겨울철이 되면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몰리는 곳 중의 하나가 장충체육관이다.
서울에 최초로 등장한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1일에 문을 열었다. 장충(獎忠)이라는 명칭은 1895년 을미사변 때 희생된 홍계훈, 이경직 등 순직한 신하들을 위해, 고종이 1900년 9월에 장충단(獎忠壇)을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 후기 오군영의 하나인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으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고종 때 장충단을 짓고 순직 신하들의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처음에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영관 이경호를 주신으로 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다가,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
1900년 11월에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장충단비’를 세웠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는 황태자 순종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의 비문은 고종의 칙령으로 육군부장 민영환이 찬(撰)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1908년 장충단의 제사는 중지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후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장충단에서 거행하여, 원래 장충단을 설치한 목적을 일제가 완전히 왜곡하였다. 1910년 이후 일제는 장충단비도 뽑아버렸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벚나무를 심고 여러 시설물을 설치하면서 일본식 공원으로 만들었다. 1932년 상해사변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폭탄삼용사’의 동상을 세운 것은 만행의 극치였다.
1945년 이후 일제가 세웠던 시설 다수를 철거하였고, 장충단비를 찾아서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다. 1969년에는 현재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쪽으로 옮겼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설치되었는데, 세종 때 강수량 측정을 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마전교 서쪽에 세우면서 수표교로 불리게 됐다. 1959년 청계천을 복개(覆蓋)하는 과정에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고 현재에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단공원 동쪽(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다. 사찰이 자리를 잡은 언덕은 춘무산(春畝山)이라 하였는데, 박문사는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일제는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활용하였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떼어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흥화문은 1988년 경희궁으로 돌아와 원래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장충체육관 옆으로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한양도성이 이어진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이 구간에 일부 남아 있는 각석(刻石:글씨가 새겨진 돌)에는 ‘흥해(興海)’, ‘하양(河陽)’ 등 현재의 경상북도 지명이 새겨져 있어서, 이 구간 공사는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맡았음을 알 수가 있다.
장충단공원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10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유세 대결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장충동에서 원조 족발집, 1946년 명동에서 설립하여 1973년 장충동 이전 후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빵집 ‘태극당’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