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전쟁·가난·北도발 등 국난 극복
세계 10위권 선진국 도달 눈부신 성과
정의감 투철하고 민주주의 신념 확고
정치 지도자 ‘세계시민정신’ 함양 중요
단합·희생 정신 약해지고 대립 극대화
타인 사고 존중하는 시민정신 갖춰야
트럼프 2기 대외정책은 도전적 과제
對中관계·북핵 커다란 안보 위협 요인
자체 핵무장 주장 국익에 도움 안돼
“우리는 건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국가적 위기와 마주했지만, 반전과 국운 상승의 기회로 만들어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 대표적 국가 원로로 손꼽히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그에 따른 충격파로 과거 어느 때보다 ‘위기’란 말을 자주 접하는 요즘이다. 반 전 총장은 인터뷰 내내 한국이 처한 현 상황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우리가 지닌 ‘저력’에 더 큰 비중을 뒀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점, 외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올라선 점 등을 언급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러한 성취를 이룩한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10년간 유엔을 이끈 지도자답게 반 전 총장은 ‘세계시민정신’(Global Citizenship)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세계시민으로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공동체의 단합과 평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다른 나라들을 선도할 수도 없다”는 말로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부터 올바른 언행의 모범을 보일 것을 주문했다. 다음은 반 전 총장과의 일문일답.
―광복 80주년을 맞은 소회와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되고 80년 동안 전쟁, 가난, 사회 혼란, 경제난과 북한의 도발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합심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오늘날 경제, 군사, 문화 분야에서 세계 10위권 선진국 문턱에 도달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앞에는 커다란 도전이 놓여 있다. 중국 첨단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고 규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한국이 여러 국난을 극복하고 세계에서 평가받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제일 중요한 요소는 우수한 국민성과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공동체 의식과 헌신의 정신을 발휘해 왔다. 1950년 6·25전쟁, 1997년 외환위기에서도 그랬다. 우리 국민은 교육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상회하는 유일한 나라다. 또 한국인은 정의감이 투철하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민주적 제도를 달성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글로벌 선도 국가로 발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정치 지도자들이 세계적 안목을 갖추고 우리 국민도 세계시민정신을 함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등학교부터 인성교육을 시키고 가정 안에서도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과거 우리가 발휘해 온 단합과 타협, 헌신과 희생의 정신은 약해지고 진영 간 대립이 극단화하고 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가 바람직하지 않아 자라나는 세대들이 무엇을 배울지 참으로 걱정된다. 서로 신뢰를 쌓고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나와 다른 사고 방식도 존중하는 글로벌 시민 정신이 우리 정치 지도자들에게 심각하게 결핍되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2·3 계엄 사태와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로 국가적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 각국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에 따른 외교, 안보, 통상 등 분야별 대응책 마련과 국익 수호에 주력하고 있으나 한국은 국정 공백으로 그렇지 못한 처지다. 미증유의 내우외환 속에서도 여야는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며 정쟁에 몰두하고 있으니 국민 사이에 ‘한국호(號)가 이대로 좌초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크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해달라.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혼란과 불안정의 와중에도 그나마 우리의 헌법 절차와 헌정 제도가 민주적으로 작동되고, 시민의 성숙한 민주 역량이 발휘되는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큰 힘이고, 우리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경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해 신인도가 추락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간 극심한 갈등을 딛고 국민 통합의 길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2·3 비상계엄은 잘못된 판단에 기초한 위험한 조치였다. 그러나 다행히 즉각 해제되었으며 대통령도 모든 정치적·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고, 그에 따른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제 우리 모두 평정심을 갖고 (사법부) 판결에 승복하겠다는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치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난국을 당리당략을 챙기는 방편으로 대한다면 나라에 큰 상처를 입히고 역사와 국민의 준엄한 평가가 뒤따를 것이다. 국민 통합은 결코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민주적 제도, 즉 인사·예산·정책과 함께 건강한 시민의식, 인성 함양 같은 민주적 시민 역량이 함께 결부될 때 결실이 맺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헌법 개정 논의가 확산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대통령의 권한과 임기, 입법부·행정부의 건전한 균형과 견제, 특히 21세기 글로벌 환경에 걸맞은 국민 기본권 등을 보다 효율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담아낼 필요가 있다.”
2015년 체결된 파리 기후변화 협정은 반 전 총장이 유엔을 이끌며 세운 최대 업적 중 하나다. 세계 각국이 탄소 배출 감축을 통해 지구 표면 평균온도 상승 폭을 산업화 전 대비 2도 이내, 가급적 1.5도 이하로 제한키로 한 것이 파리 협정의 핵심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취임과 동시에 미국의 파리 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반 전 총장은 리비아, 이란, 예멘 등 극소수 나라만이 파리 협정 미가입국이란 점을 들어 “국제사회의 지도국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반 전 총장은 지난달 27일에도 국제원로 그룹인 ‘디 엘더스’를 대표해 발표한 성명에서 “기후변화는 전 지구적 위협으로, 국제적 협력 없이는 다룰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은 미국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킬 것이며, 미국의 안보적 목표를 방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에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우리 외교가 많은 난관에 부닥치겠지만 지나치게 위축되거나 수세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국 견제 동참 요구, 그에 따른 주한미군 역할 변경,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직접 대화 가능성은 우리와 직결된 커다란 안보 위협 요인이 될 것이다. 다만 방위비 분담 증액 요구는 여타 사안보다 비중이 높다고 볼 수 없다. 차분히 미국 측 태도와 요청을 보면서 협상을 통해 해결해 나갈 수 있다.”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거쳐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는 경우 우리도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수호해 온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상대하며 북한 비핵화는 내팽개친 채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인터뷰 직후인 지난달 28일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핵 위협에 대응할 목적으로 우리가 자체 핵무장을 거론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려면 먼저 NPT에서 탈퇴해야 하는데 국제사회로부터 제재를 받아 우리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기업과 국민 모두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자체 핵무장 대신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 운영을 더욱 긴밀히 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해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을 재개정함으로써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권, 즉 농축과 재처리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유럽 등에서 난민·이민 이슈를 둘러싼 극우 포퓰리즘 움직임이 뚜렷하다. 점차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바뀌어 가는 한국은 이런 흐름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한국 내 외국인은 약 246만명으로 총인구의 4.8%에 해당하며 2030년 다문화 국가로 진입할 것이 예상된다. 포용과 관용의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 지도자는 물론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종교계와 교육계, 언론계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82억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세계시민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유엔 제5사무국을 유치하자는 제안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 아이디어는 그간 몇몇 정치인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제5사무국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유엔 회원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유엔사무소가 들어설 인프라를 갖춰야 하므로 우리의 예산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DMZ에 세워질 유엔사무소가 한반도의 평화증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수 있을지도 검토해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944년 충북 음성 출생 ●1970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제3회 외무고시 합격 ●1998∼2000년 주 오스트리아 대사 ●2003~2004 대통령 외교보좌관 ●2004∼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 ●2007∼2016년 제8대 유엔 사무총장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이사장(2019년~현재)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명예원장(2022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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