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 美·中뿐… 규제 완화 매우 중요
정치 불확실성에 경제 부담 가중 상황
안정적 관리 메시지 내고 액션 취해야
수출산업 일부 섹터 의존 탈피 바람직
노동시장 유연화·재정준칙 도입 필요
유일호(70)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우외환에 빠진 우리 경제를 지탱하려면 수출이 버텨줘야 한다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줄 ‘촉매’로 AI를 콕 집었다. 이미 미국과 중국보다 투자규모 등에서 크게 뒤처졌다는 비관론과 AI 혁명이 전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통계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무용론 등을 의식한 듯 정색하며 획기적인 규제 완화와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절박함과 함께 ‘희망’도 묻어났다. “AI가 산업 전면에 등장한 상황이라 그간 강의도 듣고 책도 찾아봤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선두주자 중 하나로 그렇게 불리한 위치가 아니라고 하더라. 경쟁자는 미국과 중국밖에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건은 유럽과 일본보다 한 발 앞인 게 틀림없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는 데 무척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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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전 부총리의 전언처럼 AI 칩에 필수인 반도체 생산기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에서 1·2위를 다툰다. AI 시대가 본격 도래하려면 빅데이터도 중요한데, 이를 축적해온 거대 플랫폼인 네이버·카카오도 있다. AI 활용을 위한 데이터센터에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데, 그런 여력도 충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데이터의 처리에 드는 막대한 전력을 생산할 기반도 갖췄다. 특히 차세대 원자력발전으로 꼽히는 소형모듈원전(SMR)은 이미 두산에너빌리티가 주요 설계업체에 기자재를 공급하면서 설비제작 능력을 인정받았고, 국내에서 개발 중인 자체 모델 i-SMR은 2034년부터 1호기가 가동될 예정이다. 자동차와 가전 등 AI 기술이 접목될 제조·정보기술(IT)업도 글로벌 톱클래스 수준이다.
유 전 부총리는 박근혜정부의 마지막 경제 사령탑으로, 2016년 12월 박 전 대통령 탄핵정국 당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을 맞아 동분서주한 바 있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로 국정 리더십이 공백인 상태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선 데 대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년 전 데자뷔 상황을 맞아 참으로 걱정”이라며 “그때도 탄핵 전부터 경제 상황은 썩 좋지 않았지만, 2017년 1분기부터 반도체 호황이 이끌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계엄·탄핵 정국이 아니었으면 본격 대응도 진작 시작했을 텐데 가장 중요한 경제 이슈가 2순위로 밀려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8년 전과 달리 정치적 불확실성에 경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게 유 전 부총리의 진단이다. 당시만 해도 여야는 헌법재판소에 탄핵심판을 맡긴 채 비상 상황 수습에 협조했다고 한다. 18·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작금의 정치 현실에 따끔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데 더 힘 빠지게 하는 것 아니겠냐. 정치라는 게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인데, 탄핵은 헌재에서 다툴 문제인 만큼 더는 불확실성을 키워선 안 된다.”
현재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이기도 한 유 전 부총리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1가 교보생명빌딩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회의실에서 1시간 30분 넘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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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경험을 토대로 정부정책 우선순위를 조언한다면.
“경제팀은 ‘안정적인 관리’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안전판을 마련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내놔야 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액션도 취해야 한다. 환율은 원화 가치에 비해 미 달러가 고평가된 상태이다. 통화당국인 한국은행과 기재부의 관리로 조금씩 안정돼가고 있으니 더는 급격하게 상승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금리는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직접 나서 비상 상황에 맞게 변동성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팀이 더불어 글로벌 신용평가사나 외국 투자자를 상대로 ‘정치와 달리 경제 상황은 불안하지 않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8년 전에도 그런 노력을 했다. 국내 소비자와 투자자를 상대로도 ‘급격한 변동이 없도록 하겠다’는 메시지를 주고 액션도 취해야 하겠다. 경제 주체들을 안심시킬 대처는 더 필요하다. 재정정책도 같이 가야 한다.”
―추가경정예산을 시급히 편성하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비상 상황이긴 하지만 본예산부터 제대로 써야 한다. 추경은 긴급한 필요가 있을 때 하는데, 본예산을 제대로 집행하기도 전인 연초부터 편성하자는 것은 맞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경제 상황이 안 좋으니 (경제팀도) 카드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대 야당이) 본예산을 (삭감한 채) 통과시켜 놓고는 추경이라도 해야 한다는데, 그렇게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 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선다.”
―이번에도 탄핵 정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취임을 맞았다.
“4년 전만 해도 ‘신정부가 들어서니 불안하다’ 이런 정도였는데, 겪어 보니 말만 앞서는 게 아니더라. 이번에도 (우리 경제에) 부정적 효과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는 미국의 정책이 미치는 영향이 큰 탓에 받아들이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관세율은 끔찍한 수준까지 언급했던데,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구사하는 전략이 말로 겁도 주면서 상대편이 기분 나쁠 정도로 거칠게 몰아세워 뭔가 ‘딜’을 하려는 것일 터다. 겉보기보다 협상 여지는 있다. 미국이 아쉬워서 투자해달라고 한 데서 접점이 있을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도 얘기했듯 조선업이 그렇다. 조금 있으면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라고 분명히 할 텐데 (그때)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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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가 수출 주도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수출 주도형이 문제라기보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몇몇 산업 섹터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탈피해야 한다면 맞는 지적이다. 반도체나 조선·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 제조업 경기에 따라 경제 전체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정도로 파급효과가 크다는 게 문제다. 최근 K팝과 같은 소프트웨어에서 약진하지 않았나. 대표 수출상품이라고 하기는 이르지만, BTS나 뉴진스가 세계적으로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규모가 반도체와는 상대가 안 되지만, ‘오징어 게임’과 같은 K드라마 등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앞으로 우리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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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을 극복하려면 노동·연금 등 구조개혁에도 힘써야 하는데.
“그리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노동개혁은 정치적인 허들이 너무 많다. 전반적인 합의를 못 볼 것 같으면 다급한 주 52시간 근무 예외 적용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지역별로 차등을 두기는 쉽지 않을 거다. 직종별 (차등은) 합의는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렇게라도 (경직된 노동시장에) 숨통을 터줘야 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서 반도체특별법을 통해 연구·개발(R&D) 부분은 52시간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전향적으로 화답했더라. 정말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근본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가 아니겠냐. 노동계와 대화해 독일의 하르츠 개혁과 같이 추진해야 한다. 정년 연장도 고용의 유연화와 연결돼있는데, 기업 자율에 맡기면 된다. 연금은 자꾸 구조개혁을 미루는 대신 기금의 고갈 시점을 늦추는 합의만 하려는 건 문제가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복지 지출이 늘고 있는데, 재정 형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에서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 중인데, 야당의 반대로 진척이 없다.
“재정준칙은 도입해야 한다. 복지 지출은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면 자동으로 늘어나는 의무지출이라 깎거나 없애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재정적자 요인을 줄여가는 정책이 불가피하다. 복지 지출을 통제하는 개혁에 성공한 나라가 스웨덴이다. ‘복지의 천국’이라 불렸던 스웨덴은 1990년대 생산적 복지를 통해 취약계층 자활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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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출생아가 전년보다 늘어나고, 결혼 건수도 증가하는 등 저출산 정책이 효과를 거둔 게 아니냐는 평이 있다.
“그간 정부는 국민의 사교육비·주거비 부담을 덜어주고, 어느 정도 현금 지원까지 했다. 당장 효과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재정 부담도 크지만 계속해야 한다. 입양도 활성화해야 하겠지만, 이민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간 국민 수용성이 조금 높아진 거 같다. 외국인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해소하려면 이민 문호를 더 개방해야 한다. 박근혜정부 때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주권을 확대했는데, 당시에는 실효성이 떨어졌지만 지속해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시절에 일본 문부성처럼 우리 교육부도 외국 학생에게 장학금을 많이 주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유치하면 지방 대학의 정원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학점 관리도 돕고 취업도 알선한 뒤 일을 잘하면 영주권을 줘도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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