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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라 더 부담… 명배우들 덕에 완결성 커져”

입력 : 2025-02-09 21:15:37 수정 : 2025-02-09 21: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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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연출 김재엽

20C 최고 극작가 밀러 대표작 맡아
문어체를 자연스러운 대사로 바꿔
“경력 50∼60년차 배우들 힘에 감탄
3시간 공연에도 매번 혼신의 연기
가족 이야기에 오열하는 관객 많아”

2025년 초 연극가 최대 흥행작은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명연기, 시대를 초월한 극본, 섬세한 연출이 어우러졌다. 특히 연기 경력 60년을 넘긴 박근형·손숙과 50년 차를 바라보는 예수정·손병호가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늙은 세일즈맨 부부를 연기하며 무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아서 밀러의 걸작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김재엽 연출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극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극작가이기도 한 김 연출은 “희곡이 완벽하고 훌륭한 배우들이 무대에 서면 작품의 완결성이 저절로 갖춰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최상수 기자

77년 전 쓰인 원작 대본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는 연출가 김재엽이다. 묵직한 대본과 출연진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며, 우리 삶과 다르지 않은 가족의 애증을 담아 현대적인 비극을 완성했다.

 

2002년 신춘문예로 데뷔한 김 연출가는 실험극으로 유명한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 출신. ‘알리바이 연대기’, ‘자본’ 시리즈 등 주로 자신이 직접 쓴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20세기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히는 아서 밀러(1915~2005) 대표작을 연출했다.

 

지난 4일 공연장(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만난 김재엽 연출은 “부담이 많이 됐다. 다 갖춰진 상태에서 작품이 잘못 나오면 연출을 잘못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라며 “사실 많이 배우는 느낌으로 (제작 현장에) 가곤 했다”고 말했다.

 

특히 3시간에 달하는 공연 동안 매번 혼신을 다하는 박근형 등 원로배우의 철저한 연습 태도에 김 연출은 감탄했다. “어떤 대목에 대해 노트(연출 지시)를 드리면 보통 우리 세대는 그 부분만 다시 연습하는데, 박 선생님은 ‘그렇다면 이 장면을 전부 다시 하자’며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십니다. 연습량이 어마어마하신 거죠. 연극을 그렇게 배우고 해오셨던 거예요. 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따로 느낀 점이 있으시면 메모해뒀다가 다음 날 ‘내가 생각해봤는데 한 번 바꿔보자’ 하시고, 또 이상하다 싶으면 ‘다시 한 번 해보자’ 하시곤 했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맡은 박근형 배우(오른쪽)가 아들과 대화하며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장면을 열연 중이다.쇼앤텔플레이·T2N 미디어 제공

아서 밀러가 1948년에 쓴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듬해 처음 공연돼 토니상·퓰리처상을 받은 걸작이다. 국내에서도 국립극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극단 신협이 1957년 1월 초연한 후 숱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워낙 많이 공연된 작품이어서 이번 무대에 선 배우 대부분 이전 출연 경험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까다로우면서도 식상하기 쉬운 작품이다. 늙은 주인공 머릿속 생각이 현실과 뒤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면서 관객은 물론 배우마저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다.

 

그런데 김 연출은 “희곡이 완벽하고 훌륭한 배우들이 무대에 서면 작품의 완결성이 저절로 갖춰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애초 제작사 측에서는 관객 부담 등을 고려해 30분 정도 시간 단축을 원했다. 검토했으나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2박3일 동안 벌어지는 사건 안에서 수십 년 인생 이야기가 흘러가고, 죽은 사람까지 불러내는 아주 밀도 높은 구성이라 함부로 빼거나 손댈 수가 없었어요. 읽어보면 하나하나 다 필요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죠.”

 

대신, 김 연출은 원작을 충실하고 섬세하게 해석하면서도 대사를 고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대학 시절부터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삼성출판사 1976년판과 민음사판, 그리고 영문판을 꼼꼼히 비교하며 자연스러운 대화로 다듬었다. 그 결과, 대공황 시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지금 우리의 삶을 담은 드라마로 다시 태어났다.

 

김 연출은 “문어체를 배우들 입말로 바꾸는 작업을 끊임없이 했다”며 “(박근형·손숙 등) 선생님들이나 젊은 배우들도 언어에 민감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우리 편한 대로 바꿔버리면 원래 의미가 손상될 수 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고, 또 선생님들은 특히 연극을 언어 예술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사에 대해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평생 몸 바친 회사에서 해고당한 세일즈맨을 통해 비정한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가족극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향한 자식의 원망이 중심을 이룬다. 문제의 근원은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허세에 빠져 자멸하는 아버지다.

 

김 연출은 “원작자인 아서 밀러나 당대 미국인 다수는 이주민의 아들이었다. 이 작품은 결혼하고 집을 사고 성공해야 남자로 대접받던 시대의 산물”이라며 “소년이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보니 극을 보러 온 아버지 세대는 할부금 마련에 허덕이는 늙은 세일즈맨에게 공감하지만, 젊은 세대는 ‘너는 성공할 수 있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는 아들 형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한다. “맏이들 꼭 봐라”, “K-장남·장녀 꼭 봐라”라는 후기가 이어지고, 막내들은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둘째 아들에게 공감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그만큼 고전의 힘이 관객을 정서적으로 끌어당긴 결과다. “(원로) 선생님들도 ‘이건 옛날얘기가 아니다. 늘 우리한테 있는 얘기’라며 ‘고전이란 현재적인 가치가 계속 증명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품에 대한 확신이 선생님들 모두 있으셨어요.”

 

확신에 찬 연기는 관객을 움직인다. 김 연출은 “누구나 가족에 대한 체험이 있고 나를 비춰 볼 수밖에 없으니까 오열을 하는 관객이 꽤 많다”며 “작품에서도 아들이나 아버지가 서로에게 했으면 마음을 움직일 만한 말이 무척 많은데 엉뚱한 상대 앞에서 털어놓고 막상 당사자 앞에선 그 얘기를 못 한다. 우리 모습도 그렇다”고 아쉬워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꿈을 가지고 무엇을 삶의 가치로 삼을지 스스로 알면 되는데, 대부분은 나 자신을 알기 전에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는 데서 가치를 습득하기 때문에 결국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공연은 3월3일까지.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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