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 양극화에 갇힌 정치
정당 의사결정구조 자체가 문제
목소리 큰 소수 강경파 영향력 절대적
당 지도부마저 제어 못하고 눈치 보기
전문가 “꼬리가 몸통 흔드는 격” 지적
비대해진 권력 탓 필연적 부작용
과도한 권한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맞물려 악순환
소수의견 대변 못하고 양당체제 강화
계엄 사태 계기로 개헌 여론 분출
극단적 진영 정치 폐해 갈수록 심해져
대통령 권력 분산·의회 독주 견제 대두
대선 후보군도 앞다퉈 “헌법 바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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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에 의한 계엄 발동 사태가 터졌고, 곧이어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체포 및 구속이 이뤄졌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세 번째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이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여야 정당을 넘어 광장의 탄핵 찬반 목소리가 커지는 데다 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와 같은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작금의 위기는 정치의 실패라는 데 이견이 없다. 거대 야당은 현 정부 공직자에 대해 20건이 넘는 탄핵안, 여야 합의 없는 특검법을 남발하고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 ‘협치’ 공간, 중간 지대가 사라졌다. 정당 내부 구성원들과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정당 내부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영주의’, ‘극단주의’ 같은 강경파 목소리가 전체 의사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민주주의 사회 정당의 기본 기능인 ‘다양한 의견 보장’이 실종된 것이다.
양극화에 갇힌 정치를 구하는 것도 역시 정치일 수밖에 없다. 12·3 비상계엄을 무력화한 것은 여야 의원들이 합세한 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었다. 전문가들은 현행 ‘승자독식’형 정치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진영정치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승자독식형 정치구조 개편은 정치권의 몫이다. 87년 체제 이후 8명의 대통령 말로는 불행했다. 이제는 대통령제와 선거구제 같은 제도적 개선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때라는 게 정치 원로들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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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정당
“정당의 책임이 가장 크다. 정치인이 다수 국민이 아닌 소수 팬덤 눈치를 본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지지 세력을 동원해 진영 대결을 부추기는 나쁜 정치가 발호하고 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런 ‘나쁜 정치’가 발호하는 데는 정당 내부 결정 과정에 강경파 목소리가 과다 반영되는 탓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민의힘 전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야 모두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며 “양쪽 모두 극한적으로 대립하다 완전히 망해서 없어지는 형국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한 민주당 전직 의원도 “‘인터넷’과 ‘SNS’가 과잉대표 되면서 합리적 다수가 아닌 ‘목소리가 큰 소수’가 절대적 결정권을 갖는, 정당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목소리 큰 소수’는 어떻게 정당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민주당 지도부에 참여했던 한 전직 의원은 “지도부가 ‘목소리 큰 소수’를 제어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영합을 한다”며 “당내 선거나 경선에서의 동원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당직을 결정하는 내부 경선은 물론 선거 전 공천과정에서의 ’응집된 소수’가 당락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변수가 된 것이다. 이 전직 의원은 “내부회의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강경파쪽 의사를 대변하는 사람이 와서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누구도 거기에서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말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된다”며 “결국 다들 ‘보복’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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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정당 의사결정에서 참고차원으로 쓰였던 여론조사가 점차 의사결정의 중요수단이 된 환경도 극단주의적 정치지형을 만드는 토대로 작용한다. 조귀동 정치컨설팅 ‘민’ 전략실장은 “민주당 공천 과정에서 소위 ‘수박’ 정치인들을 떨어뜨리겠다면서 나온 ‘저격수’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지지자 내에서는 100% 지지가 나오는데, 중도나 보수로 가면 지지율이 ‘0’으로 떨어졌다”며 “진영 내부에서 도는 정치담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굉장히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정치학자 박상훈 박사도 “정당 대표를 뽑거나 공천을 하는 등 권력자를 결정할 때 여론조사를 쓰면서 일종의 권력화가 됐다”며 “여론조사가 과도하게 정치 역할을 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의견보다는 눈에 두드러지는, 주목받는 사람들 중심의 엘리트 정치가 됐다. 약자들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진영정치의 폐해는 국민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키운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2∼23일 전국 성인 1514명에게 패널 중 무작위추출 방식 웹 조사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힘이 매우 싫다(호감도 100 중 10 미만)’고 응답한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는 69.0%, ‘민주당이 매우 싫다’고 답한 국민의힘 지지자는 58.8%였다. EAI가 2021년 조사한 결과와 비교했을 때 ‘국민의힘이 매우 싫다’는 민주당 지지자(40.8%)는 28.2%포인트, ‘민주당이 매우 싫다’는 국민의힘 지지자(50.5%)는 8.3%포인트 늘어났다. 해당조사의 응답률은 27.4%,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52%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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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정치 극복 위해 제도 바꿔야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와 ‘50%+1표’만 얻으면 100% 권력을 독식하는 ‘소선거구제’가 만나면서 한국 정치의 실종은 극대화된다.
박 박사는 저서 ‘혐오하는 민주주의’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국 민주주의는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의 민주주의로 퇴락했다”고 평가했다. ‘청와대 정부’로 상징되는 대통령 권력 집중은 해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승만정부 시절 7명에 불과했던 대통령 비서실은 박정희정부에서 227명으로 크게 늘었다. 노무현정부 정원 533명(경호처 제외)을 거쳐 이명박·박근혜정부 각각 456명으로 줄었다가 문재인정부 들어 490명으로 회복돼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는 초강대국 미국 백악관 비서실 정원 523명(2023년)과 맞먹는 수준이다.
대통령실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실 직원 500여명, 이들의 직간접 영향을 크게 받는 정부부처 공무원을 포함하면 수천명의 사람들이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보고서를 쓰고 일을 하는 구조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권력 비대와 이에 따른 부작용이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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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대 총선에서는 전국 254개 지역구 전체 유효투표(2923만4129표)의 41.5%인 1213만6757표가 사표(死票)가 됐다. 유권자 절반 가까운 목소리가 국회에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첫 총선부터 소선거구제를 채택해 5대와 9∼12대 국회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운영한 것을 빼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선거구제는 선거구당 의원 1명을 선출하는 제도다. 선거구당 2인 이상의 대표자를 뽑는 중대선거구제와 다르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거대 양당 체제를 강화한다는 지적을 받고, 제3정당 등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권력 분산에 주력하고 있다. 독일은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동일하게 배분해 다당제를 뿌리내렸다. 스웨덴 등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아예 전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도농복합형 선거구제, 대선거구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양당제 등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기득권 포기에 나서지 않는다. 거대 양당이 현행 제도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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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 사태 이후 정치권에서 분출하고 있는 개헌론도 대통령에 쏠린 권력을 분산하고 정당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 법학계와 정치학계 학자들이 발표한 ‘새헌법안’은 대통령에 집중된 인사권을 제한하는 대신 국회도 상원, 하원으로 나눠 상호 견제할 수 있는 틀을 담았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여야 대선 후보군도 개헌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4년 중임제를 기반으로 국회가 내각 불신임권,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을 갖는 형태의 권력구조 개편을 주장한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4년 중임제를 선호하지만 최근 국회의 과도한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양원제와 중대선거구제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야권에서 김동연 경기지사는 4년 중임제와 책임총리제를 골자로 한 개헌 등 권력구조 개편과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가장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개헌에 선을 긋고 있어 공론화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유인태 전 국회사무총장 등은 개헌보다는 정치 세력을 다양화하는 선거구제 개편에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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