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비슷한 악몽을 꾸며 30년을 지내왔습니다. 이젠 잊힐 만도 한데….”
1980년 5월18일. 광주 금남로에 있는 중국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김범동(당시 34세)씨. 그는 아내와 여섯살배기 딸과 함께 언젠가 중국집을 열고 오순도순 사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5월18일이 지나자 그는 ‘빨갱이’, ‘폭도’가 돼 있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난 뒤에는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가 됐다. 원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김씨는 그날 밖이 유난히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게를 나와 보니 한 여자가 뛰어가고 군인 2명이 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예비군 훈련을 하나’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이내 군인들이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몽둥이로 때리고 군화로 짓밟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 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이번에는 등 뒤에서 “전라도 ‘놈’들 씨를 말려라”라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행이 김씨에게 쏟아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목과 허리 뼈에 이상이 생겼다. 엉덩이는 대검에 찔려 거동도 불편했다.
김씨의 소박한 꿈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국집을 전전했지만 허리를 다쳐 등을 구부리고 움직여야 하는 김씨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아내에겐 못난 가장이었고, 돈이 없다 보니 딸에겐 거짓말쟁이가 됐습니다.”
통증으로 매일 밤 술을 찾다가 결국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다. 그러다 보니 5·18 얘기만 나오면 쉽게 흥분했고 주위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발생했다.
그나마 가족들 덕분에 마음을 잡고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04년엔 유공자로 인정돼 무료로 허리수술을 받아 굽었던 등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가 겪은 정신적 고통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몸은 어느 정도 고쳐졌지만, 그때 충격으로 여전히 악몽을 떨치진 못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는지 답답하기만 하네요.”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아직도 그날의 고통이 짙게 배어 나왔다.
이귀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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