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만에 나타난 ‘김정일의 입’ 북한 조선중앙TV 리춘히 아나운서가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8시30분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정일의 출생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북한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16일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중·일·러 전문가들은 그보다 1년 앞선 1941년 2월16일 김정일이 러시아 극동지역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바츠코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으로 알려져 있다. 1945년 11월 부모와 함께 소련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귀국했다. 그는 ‘유리’라는 러시아식 아명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용했다. 그의 남동생으로 알려진 김만일(아명 슈라)은 강에서 놀다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가 좋았던 동생에 이어 7살 때 어머니를 여의면서 계모 김성애의 손에 자랐다. 그는 1980년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이름을 정일(正一)에서 정일(正日)로 바꿨다.
◆가족 간 권력투쟁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있었지만 그는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1948년 평양시내 남산소학교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중국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휴전 후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를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22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졸업 후 평당원으로 활동하다 1964년 6월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됐다. 그 뒤 1973년 9월까지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이 무렵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 이복형제로 역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이 시작됐다. 그는 1970년대 들어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내며 자신의 잠재적인 적들을 숙청했으며, 김영주와 김평일을 실각시키고 후계자 지위를 다졌다.
황장엽 전 노동당 총비서는 생전에 “김정일은 성격이 독해 경쟁자들을 제치고 권력을 잡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 비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활동을 미화시킨 영화와 연극, 소설 등의 창작을 지휘하며 김일성의 동료들을 감동시켜 후계자로 낙점됐다고 밝힌 바 있다.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전원회의에서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그후 김정일은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곁가지’로 규정해 1975년부터 이들과 연관된 인물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하고 당사자들은 해외로 보내 불만을 봉쇄했다.
◆유훈통치와 ‘선군정치’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시대가 열렸다. 그가 이어받은 북한의 당시 경제상황은 처참했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사회주의체제의 근간이었던 식량배급제가 붕괴하면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이 마비되는 등 사실상 국가기능을 상실했다. 대외적으로도 미국과 대립하고 전통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과 수교를 맺는 등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됐다.
결국 그는 김일성 3년상을 내세우며 ‘유훈통치’를 이어갔다. 부정적 이미지를 아버지에게 떠넘기며 정치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김일성 사망 3주기가 끝난 1997년 9월 추대형식을 통해 그는 당 총비서에 오르며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했다.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북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선군정치’로 불리는, 군사력에 의지한 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2002년에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과 ‘신사고론’ 등 미래를 향한 비전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4년 미국과 외교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내는 한편 남한의 김대중 정부와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 남북교류의 길을 열었다. 2000년에는 반세기 만에 첫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6·15공동선언에 서명했다.
◆뇌졸중에서 심근경색 사망
김정일은 2008년 9월9일 북한의 최대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모습을 감춰 건강 이상설이 증폭됐다. 그는 한 달 전인 8월15일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건강 악화에 따라 2009년 1월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작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는 등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아울러 작년 5월 이후 세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건강 이상설을 일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7일 오전 8시30분 현지지도를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후계체제 안착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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