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사라졌다는 건 마음이 식었다는 징표다. 무쇠솥이 장작불을 만나지 못하고 싸늘하게 방치돼 있다는 얘기다. 그 식은 마음에 시가 깃들 리 만무하다. 하물며 평생 ‘그리움’을 붙들고 살아온 시인이라면 그 절망은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저문 강에 삽을 씻으며 슬픔도 퍼다 버렸던 정희성(68·사진) 시인이 새 시집 ‘그리운 나무’(창작과비평)를 냈다. 정갈하면서도 깊은 시심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시인의 단아한 시들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는 ‘그리움’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시인은 “그대에게 가닿고 싶네/ 그리움 없이는 시도 없느니/ 시인아, 더는 말고 한평생/ 그리움에게나 가 살아라”(‘시인’)고 솔직하게 고백 한다. 그는 심지어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선물’)까지 그리워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그리움은 시의 원자로이다. 시를 생산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시인에겐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리움을 질료로 이런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곰삭은 젓갈 같은’)
그가 단지 그리움에만 의존하는 시인은 아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을 역임하고 1980년대 문화운동을 펼쳤던 민요연구회 자문위원을 지낸 경력을 보아도 그렇다. 그는 명백한 잘못을 보고도 분노할 수 없다면 영혼이 죽은 것이라고 결연히 질타한다.
“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한 채/ 뭘 더 바랄 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이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부끄러워라’)
분노할 수 없다면 시도 아플 수밖에 없다. 시인은 분노를 숨기고 “창호지에 들이치는/ 싸락눈 소리”(‘寒居’)를 들으며 “시가 어디 아픈지/ 이마에 열이 나서/ 백담사나 어디/ 마음 서늘해질/ 계곡물 소리로 식혀볼까 하고”(‘시가 어디 아픈지’) 마음을 다스린다. 현실이 아무리 서늘하고 아파도 역시 시인에겐, 서럽게도, 그리움이 따스한 담요다.
“이것은 가슴을 여는 소리/ 설레는 내 마음 들었느냐/ 오직 너만을 그리워하는/ 골 깊은 이 가슴 보았느냐”(‘나의 아코디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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