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반(反)기업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기업주들의 탈법과 편법이 반기업정서를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됐다. 국민 10명중 6명꼴로 반기업 정서가 높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반기업정서가 크게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2014년 기업 및 경제현안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를 한 결과 51%가 반기업정서의 구체적 원인으로 탈법과 편법 등 기업 자체의 문제를 꼽았다고 21일 밝혔다. 조 전 부사장의 경우와 같은 기업 오너가(家)의 일탈적 행동과 불법적 행태가 반기업정서를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인 셈. 이어 ▲정경유착(31%)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미흡(9%) ▲경제력 집중(8%) ▲한국의 평등사상(1%) 등의 원인이 지목됐다.
작년 조사 때보다 탈법·편법, 정경유착을 주된 원인으로 보는 의견은 각각 8%p, 4%p 늘어난 반면 사회적 인식의 미흡과 평등사상을 지적한 의견은 6%p씩 감소했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은 오너기업인보다 전문경영인을 긍정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올해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오너기업인에 대한 호감도는 지난해의 51%에서 올해는 60%로, 전문경영인 호감도는 66%에서 79%로 크게 상승했지만 호감도 격차는 지난해의 15% 포인트에서 19% 포인트로 커졌다. 반면 기업 전반에 대한 호감도는 지난해 63%에서 올해 65%로 소폭 상승하는 등 꾸준히 반기업정서가 완화되는 추세이다.
응답자의 59.3%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기업정서가 높은 것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지난 10년간 조사에서 최저 수준이다. 이번 조사는 지난 5월에 실시된 것이어서 최근 '땅콩 회항' 사건 이후의 상황은 반영되지 않았다. 최근 대기업 오너 일가의 행태에 대한 극도의 비판적인 여론을 고려할 때 반기업정서는 다시 예전으로 회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 기업형태별 호감도, 중소기업 > 대기업 > 공기업 順
기업형태별 호감도는 ▲중소기업(85%) ▲대기업(65%) ▲공기업(45%) ▲기업집단(32%) 순이었는데, 대기업 종사자중 20%가 대기업에 대해 비호감을 갖고 있다는 답변이 눈에 띄었다. 특이한 점은 공무원 계층의 기업 호감도가 3년 연속 하락해 58%를 기록하며, 각 계층 중에서 가장 낮다는 점이다. 공무원 계층은 오너기업인에 대한 호감도도 52%로 가장 낮았다. 이들이 반기업정서의 주된 원인으로 기업 자체의 문제를 지적한 응답은 작년의 35%에서 올해는 44%로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또 내년의 반기업정서 전망에 대해서도 악화된다는 의견(26%)이 완화된다는 의견(4%)을 웃도는 등 반기업정서는 단기간에 개선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재계는 이번 '땅콩 회항' 파문으로 인한 반기업정서 확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총수 리스크와 경영권 승계 문제를 안고 있는 상당수 대기업이 조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반재벌 및 반기업 정서가 확산하자 극도로 위축돼 있다. 조 전 부사장 개인에게 집중됐던 질타와 분노가 대한항공을 넘어 국내 재벌과 기업들을 상대로 확대되면서 회사를 소유물로, 직원을 머슴으로 여기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기업에도 있지 않은지 화살을 돌리고 있다.
◆ 경영권 승계 움직임 제동 걸리나?
특히 재계는 이번 사건의 여파가 자칫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오너 자제들에 대한 경영권 승계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지 않을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총수의 법적 문제로 재판을 받거나 구속 수감돼 있는 그룹들은 '땅콩 회항' 파문으로 인한 반기업정서의 확산이 기업인 온정론의 불씨를 순식간에 꺼버렸다고 보고 있다. 재계는 어느 때보다 기업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던 시기에 조 전 부사장의 일탈행동이 일으킨 반기업정서의 확산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가뜩이나 대내외 경제환경이 좋지 않고 내년에도 경기부진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반기업정서는 기업경영 활동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반기업정서는 기업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활동에 제약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업가정신과 창업세대의 도전정신을 후퇴시키고,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시킬 공산이 크다. 특히 일부 그룹들은 대기업의 내부거래, 불공정거래에 대한 규제 강화에 이어 지배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경영권 승계가 임박한 그룹들은 반기업정서에 밀려 기업 소유구조 제도에 변화가 생기면, 그동안 짜놓은 구도가 흐트러질 수 있을 개연성도 배제하지 않고 현 사태에 대한 여론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 일부 재벌가, 뒤늦게 집안 단속 나서 보지만…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한항공의 부실한 대응을 지켜보며 최근 기업들마다 최근 위기관리 대응 체제와 매뉴얼을 점검하고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 기업문화의 병폐를 고치고 조직운영을 선진화 및 투명화하는 등 기업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내부 자성론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기업경영 활동 과정에서의 횡령이나 탈세 등 불법 행위 외에도 ▲재벌가 내부의 분쟁 ▲막말 ▲폭행 ▲일탈 행위 ▲병역기피 ▲원정출산 등 각종 의혹이 기업의 평판을 넘어 경영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는 계기도 됐다.
이에 따라 일부 재벌가에서는 자녀들의 언행에 대한 단속에 나서는 분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후계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도록 재벌가 자제들에 대한 인성 및 리더십 교육의 중요성이 상기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부와 경영권의 대물림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경영 실패시 엄청난 사회경제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도 후계 경영자에 대해 더욱 엄정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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