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잘못한 게 없다”는 윤 대통령
전모 밝혀 법·정치적 책임 물어야
제왕적 대통령제는 차후 논할 일
12·3 비상계엄 선포의 충격만큼은 아니어도 그다음 날 전해진 “잘못한 게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 발언은 귀를 의심케 했다. 헌법에 정해진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 절차를 막기 위해 국회에 투입된 계엄군의 의사당 난입은 전 국민이 실시간 목도한 대로다. 의원들을 막기 위해 계엄군과 경찰이 동원됐고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정치 활동을 일체 금지한다는 포고령(1항)이 발표됐다. 모두 위헌적 발상이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계엄군을 보내 선거인 명부 시스템 서버를 장악하려 한 사실도 적발됐다. 이해할 수 없는 비상계엄 사태의 실체적 진실은 관련자들 진술과 수사 과정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계엄 선포 나흘 만에 짧게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도 윤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정 최종 책임자로서의 절박함”을 강조하며 국민에 불안, 불편을 끼친 점만 사과했다. 계엄 선포문에서 밝힌 대로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반국가적 세력, 괴물’이라는 인식에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사실 윤 대통령은 그 전에도 ‘부패한 이권 카르텔’ ‘반국가세력’이라는 표현으로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 진영을 규정했다. 협치를 주문하는 정계 원로에 “무슨 소리냐. 나는 양아치 같은 세력 쓸어버리려고 정권 잡았다”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
캐나다 정치인 겸 학자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들이 적(enemy)와 적수(adversary)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적수는 꺾고 싶은 상대이며, 적은 말살해야 할 상대”라고 했다.(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상대를 궤멸해야 할 적으로 삼는 한국의 극단적 정치 문화가 하루 이틀 문제는 아니지만, 군대를 동원해 의회 민주주의와 국민 자유를 저당 잡아 철권통치를 휘두르겠다는 지도자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발상이 즉흥적이고 일시적 충동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재임 기간 축적된 분노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악성이다.
특검 수사팀장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국정농단 혐의 등으로 구속시킨 윤 대통령은 박근혜 탄핵의 교훈을 얻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2016년 총선에서 1당을 놓쳤던 것은 정부·여당에 대한 국민의 경고였다. 그에 따라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바뀌어야 했는데도 그렇지 못한 점을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썼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압도적 참패를 당한 윤 대통령은 2년 가까이 만나지 않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한 차례 회동했을 뿐 달라지지 않았다. 지지율 추락에도 한동훈 여당 대표와 불화하면서 ‘김건희 리스크’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불리한 상황을 전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측근들과 계엄을 도모했다.
“굴욕으로 끝난 셀프 쿠데타.” 미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 지적처럼 대한민국 리더십은 또 실패했다. 정치권 안팎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실패를 말한다. 어느 정도 동감한다. 고립된 구조의 청와대든 사통팔달의 용산이든 대통령이 거주한 장소와 상관없이,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기질과 무관하게 대통령 말로(末路)는 비참했다. 여당 의원들은 이런 대통령제에서 ‘이재명 정권’ 출범 반대를 탄핵 거부 명분으로 삼는다. 제2의 적폐청산, 제2의 반민특위 바람으로 국론 분열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권력구조, 제도 문제를 꺼낼 때가 아니다. 대선 시기를 저울질하며 정치적 실익을 따질 때는 더욱 아니다. 대통령 말대로 ‘법적·정치적 책임을 지는’ 일이 우선이다. 1987년 개헌 덕분에 국회에 계엄 해제 요구 권한이 생긴 것처럼 2024년 비상계엄 사태로 제왕적 대통령에 어떤 법적 족쇄를 채울 것이냐는 차후에 논의할 사안이다. 내란죄 피의자로 대통령이 호명된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훼손했는지 밝히고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국민을 그나마 위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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