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계선 제한’ 이어 개성공단도 폐쇄 가능성
핵 시료채취 거부는 美 테이블 유도 노림수
북한이 12일 남한과 미국을 향해 동시에 ‘칼’을 뽑아들었다. 양손에 칼을 쥔 격이지만, 둘의 성격은 달라 보인다. 미국에는 칼을 들고 나와 함께 겨뤄보자는 격이나, 남한에는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김성한 교수는 “미국은 끌어들이고 남한은 밀어내는 전형적인 북한의 전술”이라고 분석했다.
대미관계를 통한 대남 압박의 의도도 읽힌다. 자신들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백악관 입성을 예약한 상황에서, 미국과의 협상에 주력함으로써 살길을 모색하겠다는 의중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은 미국과 협상해 북미관계를 개선하면, 결국 남한은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따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면서 “이런 생각에서 우리에겐 대북정책을 전환해서 남북관계를 풀든지, 개성공단 폐쇄를 포함한 남북관계 전면 차단을 감수하든지 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남북관계 전면 중단으로 가나=12월1일부터 군사분계선(MDL)을 통한 모든 육로 통행을 엄격히 제한·차단할 것이라는 북한 군부의 발표에 대해 전문가들은 단계적으로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실제 개성공단 폐쇄까지 상황을 몰고 갈 공산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이 12일 서울 도렴동 정부 중앙청사 별관에서 북한이 언급한 ‘군사분계선 통행 제한’과 관련한 정부의 입장 등을 설명하고 있다. 송원영 기자 |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달 2일에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지구에 대한 경고만 했으나, 21일에는 군사적 조치와 경협 조치, 남북관계 전반을 언급하며 범위를 넓히고 강도도 세졌다”면서 “이어 지난 6일 북한 군부의 개성공단 무력시위에, 이번 발표가 나왔다는 것은 북한이 발표 그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북한은 빈말을 하지 않으며, 한다고 예고한 행동은 반드시 한다. 그런데도 남측이 계속 무시하니까 오히려 더 자극받아 북한이 움직이고 나선 것”이라며 “우리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다음 단계는 개성공단 폐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이처럼 대남 강경카드를 고수하는 배경에는 ‘대북전단(삐라)’ 문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결국은 삐라 문제가 가장 크다”면서 “이는 북한엔 매우 민감한 문제인데, 남측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보고 강경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백 위원도 “선군정치의 사회인 북한에서 군부가 얘기했다는 것은 심각한 메시지”라며 “삐라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남측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북측은 남북관계를 이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내놓으라고 남측을 압박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도 대북 정책을 근본적으로 고민해 향후 대응조치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이번 통보가 실제 남북관계 전면 차단의 행동보다는 대남 압박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보름 이상의 시간을 두고 12월1일이라는 시한을 제시했다는 점과 개성공단 중단은 북한으로서도 상당한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고 교수는 “평상시 같으면 바로 차단했을 텐데 시간적 여유를 둔 것은 남쪽의 반응을 보겠다는 태도일 수 있다”면서 “개성공단은 북으로서도 피해를 감수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 조성으로 미국엔 협상 압박=북한이 북핵 검증에서 시료채취를 거부한 것은 미국에 대한 매우 강한 도발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 6일 미국을 방문한 리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과 만난 뒤 “과학적 절차에 의한 검증이 ‘시료채취’를 포함한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서로 완전히 이해했고 양측 간에 실질적인 의견 차이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12일의 북한 외무성 담화는 이를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북미 합의를 일종의 ‘진실게임’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위기를 조성해 협상의 모멘텀을 얻으려는 북한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는 “북핵을 후순위로 미뤄둔 오바마 차기 정부에 외교적 난제를 던져 자극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면서 “문제를 크게 만들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통일연구원 전현준 북한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리근 국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기대했던 만큼의 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번 외무성 담화는 북한의 선제 대응으로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이며, 우리를 만만히 보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기준을 제시하고 협상을 통해 차츰 선을 낮추면서, 단계마다 반대급부를 받아내려는 ‘살라미 전술’의 측면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김성한 교수는 “북미 싱가포르 협상에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핵 확산 분야를 협상 테이블에서 치워버리더니,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던 플루토늄 문제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검증으로 가장 낮은 수준을 던졌다”며 “조금씩 양보하면서 최대한 실리를 취하겠다는 북한의 협상술”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으로서는 시료채취 문제가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검증에서 시료채취는 과학적으로 북한 핵 프로그램의 과거사를 낱낱이 밝혀내는 필수적 수단이다. 90년대 초반 1차 북핵위기가 불거졌던 것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핵 검증과 시료채취에서 비롯됐으며,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한 이후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관련한 검증과 시료채취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북한이 이번 담화에서 시료채취가 합의 외 사안이라며 “서면합의 외에 한 글자라도 더 요구한다면 그것은 곧 가택수색을 시도하는 주권 침해 행위”라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상민·이성대 기자 21s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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