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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일몰 앞둔 ‘책 생태계’ 사람들의 목소리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년간 출판문화계와 16차례 협의 끝에 마련한 ‘도서정가제 개정 잠정합의안’을 뒤엎으며 완화안을 통보해 파장이 일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어디서나 책값을 제값에 사고팔도록 하는 제도다. 과도한 출혈경쟁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함이다. 3년마다 개정이 필요한 도서정가제는 올 11월 일몰을 앞두고 있다.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복잡하다. 이로 인해 책을 짓고, 유통하고, 읽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책 생태계에 가까이 닿아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나는 책을 사랑해 거리로 나왔습니다. 11년간 서울 대학로에서 책방을 운영해오다 올 11월 폐점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책값에서 10% 할인, 5% 적립 그리고 무료배송을 허용합니다. 1만원에 책을 판다고 가정할 때 할인 1000원, 적립 500원, 배송비 2500원 등 총 4000원을 책방에서 부담합니다. 도매상으로부터 책방에 들어오는 가격은 7000원입니다. 6000원 이하로 책을 들여올 수 있는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만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유통구조입니다. 그럼에도 10년을 버텼던 건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자연을 잇는 ‘이음’의 가치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이들의 존재 덕분입니다. (① 조진석, 책방이음 대표)

나는 책을 펼쳐 세상을 읽습니다. 책은 다양성이 중요한 ‘문화상품’입니다. 한 해에 약 8만종의 단행본이 대한민국 출판시장에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다양성이지요. 책은 포기할 수 없는 문화입니다. 국가 시스템이 지켜주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망할 줄 알면서도 작은 동네 책방을 차려 좋아하는 책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 돈이 안 되는(잘 안 팔리는) 책을 쓰고 세상에 내놓는 것. 이건 ‘이익만이 중요한’ 자본주의 작동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도서정가제는 다양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② 강창래, 작가)

나는 책을 통해 문화를 만듭니다. 책은 돈을 내고 구매하는 상품이 맞지만, 동시에 사회·문화적 공공재입니다. 학교와 도서관 등 공공기관이 공적자본을 투입해 책을 구매하고 시민들에게 무상 대여하는 이유입니다. 책은 저마다 고유한 주장과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고유성을 넓히는 방법으로 책이 독자들에게 다가갈 때 출판 생태계는 지속가능합니다. 가격으로 경쟁하는 획일적 환경에서 다양성이 지켜질 수 있을까요. 2014년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출간종수가 줄고 있다는 건 가짜뉴스입니다. 지금처럼 작은 출판사가 다양한 실험적 기획을 할 수 있게 된 건 도서정가제 덕분입니다. 가격이 아닌 내용으로 경쟁하고 싶습니다. (③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나는 책을 읽으며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춥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 중 ‘나의 책’을 만나는 경험은 소중합니다. 올해 초, 작은 동네책방에서 자녀들 이름으로 된 선결제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책을 사도록 기회를 준 것이죠. 우리는 이웃과 함께 책을 읽고 책방에 모여 느낌과 생각을 공유합니다. 이러한 동네책방 중심의 학교 밖 프로그램 덕에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책방이 지속가능한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와 아이들은 제값에 책을 사서 보겠습니다. (④ 한송이, 전업주부)

나는 책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동네책방의 영향입니다. 책방에서 사람과 세상을 만나고 문화를 만났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진열된 책 한 권 한 권에 사람의 생각과 감성, 손길이 닿아있음을 느낍니다. 구석구석 정이 많이 가는 공간입니다. 훗날 시집을 내고 이 책방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여는 게 꿈입니다. (⑤ 전지이, 김포하늘빛초등학교 5학년)

나는 책을 뺀 삶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책과 함께 자랐고, 책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걸 업으로 삼았습니다. 돈 안 되는 책방을 낸 것도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었습니다. 책을 파는 작은 가게가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공기처럼 스미기를 기대합니다. 책을 너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읽거나, 다독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인생에서 나를 일깨워주는 책을 한 권만 만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한 권을 만나기 위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⑥ 노명우, 니은서점 대표, 아주대 교수)

나는 책을 보며 파도를 타요. 동네책방은 바닷가 같아요.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 파도를 타는 것 같아요. 마음이, 생각이 출렁출렁합니다. 책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에요. 파도는 정확하지 않아요. 마음대로 치지요. 집에서 책을 읽으면 시간 내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유가 없지만, 책방은 그렇지 않잖아요. 여긴 내 기억이 묻어 있는 곳이에요. 사라진다면 속상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⑦ 임가희, 김포서초초등학교 2학년)

나는 책을 내고 더 가난해졌습니다. 유통망이 고도화할수록 우리는 가장 먼저 밀려나고 소외됐습니다. 다만 몇 사람일지라도 내가 쓴 문장을 읽고 구원받을 수도 있으니, 작가 개인의 노력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구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이 제도가 폐지된다면 다양한 목소리와 생각들이 멸종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⑧ 김건영, 시인)

나는 책을 만나 길을 잃곤 합니다. 독서는 우리를 멈추게 하고, 망설이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책방은 정답과 효율을 좇는 세상에서 오답을 고민하는 공간이에요. 다른 곳에서는 빨리 한곳으로 가라고 하지만, 책방은 ‘길을 잃어도 좋아, 넘어져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양성의 원천이지요. 우리는 책이, 문학이, 책방이 필요합니다. (⑨ 하명희, 소설가)

나는 책을 땔감으로 세상에 풀무질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책방은 문화의 거점입니다.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2030들이 책방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어요. 이런 책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새롭고 다양하고 이상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잘 팔리는 것만 남은 세상은 진짜 재미없을 테니까요. (⑩ 전범선, 풀무질 대표, 음악가)

 

글·사진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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