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제정된 현행 표준발음법 규정에 따르면 위 단어들의 표준발음은 ‘땅거미’ ‘보온병‘ ‘효과’로 표제어와 동일하다. 그러나 한국인 상당수가 이 단어들을 발음하면서 ‘땅꺼미’ ‘보온뼝’ ‘효꽈’ 등의 경음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인의 실제발음과 표준발음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표준어를 구사한다는 수도권 주민들도 잘못된 발음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난해 12월 수도권 주민 350명을 대상으로 265개 어휘의 발음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국어사전의 발음규칙 표기와 다르게 발음한 어휘가 65%에 달했다.
표준발음 규칙과 현실발음의 차이는 경음의 잘못된 사용 외에도 장음을 단음으로 발음하는 데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일례로 ‘김밥’과 ‘미술’은 ‘김:밥’ ‘미:술’로 발음해야 하지만, ‘김빱’ ‘미술’로 짧게 발음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더 해나가야 할 젊은층이 잘못된 발음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대 등 젊은층은 학력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잘못된 발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50대 이상 장년층과 노년층은 비교적 장음과 평음을 잘 지키는 편이나, 젊은 세대일수록 사전 표기와 달리 단음과 경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젊을수록 짧고 강한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발음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발음은 자연적으로 변한 것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개(犬)’와 ‘게(蟹)’는 표기에서만 차이가 날 뿐 현실발음에서는 차이를 드러내기 어렵다. 심지어 ‘된장찌개’와 ‘육개장’이 표준어이고 표준발음이지만, 식당 메뉴판에 ‘된장찌게’와 ‘육계장’으로 써붙인 경우가 많다. 또 ‘왠지’와 ‘웬 사람’에서 ‘왠’과 ‘웬’의 발음 차이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표준발음과 현실발음의 차이는 언어사용자들의 잘못된 습관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맑게’와 ‘밟고’ 같은 단어가 대표적인 경우다. 발음은 각각 ‘말께’와 ‘밥:꼬’로 해야 하지만 ‘막께’와 ‘발꼬’라 하는 경우가 많다. 단어를 발음하고 나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표기를 보고 나서 발음하는 현상이 일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행 각급 학교 교재에 발음지도 항목 수가 크게 줄었고, 그 내용도 ‘길이’ 하나에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발음지도에 대한 관심의 결여나 지도 소홀을 유발한다.
교육 관련 단체의 대책도 미진한 편이다. 표준발음사전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영어·불어·독일어권 등지에서는 이미 일상적으로 간행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월에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국가나 공공기관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 학자의 25년에 걸친 공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많은 단어들의 실제 발음이 국어사전에 실린 표준발음과 차이가 나는 괴리를 메우기 위해 발음 정보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표준 발음법’이 현실발음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기심 국립국어연구원 원장은 “언어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국어의 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표준어권을 비롯한 전국적인 발음 실태를 조사할 것”이라며 “표준어 규정과 실제 발음법에서 생기는 차이를 극복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고 밝혔다.
물론 제대로 된 발음을 따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공감을 사고 있다.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그동안의 교육이 우리말 잘하기 교육에 소홀했다”며 “올바른 발음과 말하는 태도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교사들이 정해진 어법에 따라 학생들이 표준발음에 맞는 말을 쓰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외국어인 영어나 중국어는 발음의 장단이나 고저에 신경을 쓰면서 교육하고 있지만 정작 국어 교육 현장에서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학생들이 토착어 운율에 거의 익숙해진 연후에 표준발음을 습득하게 되므로, 교사는 표준발음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고 발음 지도에 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종현기자/bali@segye.com
기고 표준발음에 시대 따라 변화해야
배주채 가톨릭 교수
언어생활에서 생기는 여러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말과 글의 작업이 계속돼 왔다. 조선어학회가 1933년에 한글 맞춤법을 만들고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라는 표준어 목록을 내놓으면서 표기 단어의 차이에서 생기는 장애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발음의 차이까지도 최소화할 바탕은 1988년에 문교부가 내놓은 표준 발음법으로 마련되면서부터다. |
표준 발음법의 대상은 음운과 단어다. 우선 음운을 발음할 때 자음 19개, 단모음(單母音) 10개, 이중모음 11개를 구별해 발음하고 긴소리와 짧은소리를 구별해 발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과 세대에 따라 개인이 이미 습득한 음운의 발음은 학습을 통해 고치기 어렵다. 예를 들어 ‘ㅅ’과 ‘ㅆ’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상도 사람이나 ‘ㅔ’와 ‘ㅐ’를 구별하지 못하는 세대는 대체로 이 음운들을 구별해 발음하지 못한다. 이미 굳어진 발음 습관이 노력으로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표준 발음법은 또 단어를 발음할 때 일정한 규칙을 따라야 하며 규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거기에는 어떤 예외들이 있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맑겠다’를 발음할 때 ‘맑’을 ‘막’ 대신 ‘말’로 발음하는 규칙을 따르도록 했고 ‘신문’을 ‘신문’ 대신 ‘심문’이라고 발음하는 규칙은 인정하지 않았다.
단어를 발음할 때 또한 지역과 세대에 따라 다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흙, 여덟’을 많은 사람들이 ‘흑, 여덜’과 같은 형태를 기준으로 발음하고 있다. ‘흙이, 여덟을’를 ‘흘기’, ‘여덜블’로 발음하는 것이 표준발음이지만 현실발음에서는 ‘흑이(흐기), 여덜을(여더를)’이 우세한 것이다.
국민 모두가 표준발음을 따르는 이상(理想)은 실현하기 쉽지 않다. 음운을 발음하는 경우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단어의 발음에서도 현실발음과 달리 발음하는 것이 효과적 의사소통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표준 발음법의 정신이 개인 간의 사적인 대화에서까지 표준발음을 사용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적인 언어생활에서 발음 차이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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